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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주 May 16. 2017

언어는 나름의 귀소 본능을 지닌다

사람과 말과 품격에 대한 생각들

몇 해 전 할아버지를 하늘로 떠나보냈다. 할아버지가 눈을 감던 날을 나는 잊지 못한다. 며칠째 할아버지의 의식은 삶과 죽음 사이에서 방황하며 갈피를 잡지 못하는 듯했다.


마지막 날이었다. 며칠째 굳게 닫혔던 입술 사이로“손…”이라는 단어가 흘러나왔다. 할아버지가 이승에서 남긴 마지막 말이었는데, 갑자기 툭 튀어나온 단어가 아니라 할아버지의 몸과 마음속에서 오랫동안 쟁여진 단어처럼 느껴졌다.


병원에서 일하는 지인으로부터 훗날 나는 비슷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힘겨운 싸움을 벌이던 환자가 숨을 거둘 때 “손”이라고 발음하는 경우가 꽤 있다고 했다. 입을 벌릴 기력조차 남지 않은 생의 마지막 순간에 한 번 더 가족의 체온을 느끼고 싶어서 “손 좀 잡아줘…”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날 이후 ‘손’에 대한 생각이 내 머릿속에 가득 들어찼다. 나는 틈틈이 인간의 외로움에 대해 고민했다. 그리고 인간의 고질적인 외로움을 달래주거나 그 농도를 연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타인의 손길과 언어가 아닐까 생각했다.


사람은 홀로 떨어진 섬과 같은 존재다. 사람이라는 각기 다른 섬을 이어주는 것은 다름 아닌 말이라는 교각이다. 말 덕분에 우리는 외롭지 않다.


성산동 카페 '먼스 스컬프쳐'


지금 우리는 ‘말의 힘’이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온당한 말 한마디가 천 냥 빚만 갚는 게 아니라 사람의 인생을, 나아가 조직과 공동체의 명운을 바꿔놓기도 한다.  말하기가 개인의 경쟁력을 평가하는 잣대가 된 지도 오래다. 말 잘하는 사람을 매력 있는 사람으로 간주하는 풍토는 갈수록 확산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날카로운 혀를 빼 들어 칼처럼 휘두르는 사람은 넘쳐나고, 자극적인 이야기를 폭포수처럼 쏟아내며 좌중을 들었다 놨다 하는 능변가는 홍수처럼 범람한다.

 

모든 힘은 밖으로 향하는 동시에 안으로도 작용하는 법이다. 언어의 힘도 예외가 아니다. 말과 문장이 지닌 예리함을 통제하지 못해 자신을 망가뜨리거나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이들이 비일비재하다.

 

나는 인간의 말이 나름의 귀소 본능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언어는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태어난 곳으로 되돌아가려는 무의식적인 본능을 지니고 있다. 사람의 입에서 태어난 말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냥 흩어지지 않는다. 돌고 돌아 어느새 말을 내뱉은 사람의 귀와 몸으로 다시 스며든다.


고양시 대화동 북카페 '책빵'


그렇다면 말을 잘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 질문에 나는 여전히 명쾌한 답을 내놓을 수 없다. 이런 물음을 감당할 수 없다. 사람과 사람의 언어가 그리 단순할 리 없고 시시할 리 없다.  말은 쉽게 분석하거나 함부로 답을 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다만 나는 글을 쓰고 다양한 부류의 사람을 만나면서 사람마다 인품이 있듯 말에도 언품(言品)이 있음을 깨닫는다.


사물은 형체가 굽으면 그림자가 굽고 형체가 곧으면 그림자도 바르다. 말도 매한가지다. 말은 마음을 담아낸다. 말은 마음의 소리다. 수준이나 등급을 의미하는 한자 품(品)의 구조가 흥미롭다. 입 구(口)가 세 개  모여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말이 쌓이고 쌓여 한 사람의 품성이 된다.

 

내가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에 품격이 드러난다. 아무리 현란한 어휘와 화술로 말의 외피를 둘러봤자 소용없다. 나만의 체취, 내가 지닌 고유한 인향(人香)은 분명 내가 구사하는 말에서 뿜어져 나온다.


제주도 카페 '동백'에서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작가의 생각과 마음을 읽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나’를 읽는 것이다. 《말의 품격》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스스로 자신의 말과 세계관에 대해 끝없이 질문을 떠올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책을 덮은 뒤 때로는 당신의 입이 아닌 귀를 내어 주면서 상대의 마음을 얻었으면 한다. 또한 당신의 가슴속에 꼭꼭 숨겨두었던 진심을 건져 올려 그것으로 상대의 아픔을 어루만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리하여 지금 당신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꼭 그럴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당신의 말이

누군가에게

한 송이 꽃이 되기를...

('말의 품격' 서문 중에서)



몇 권의 책과 각종 매체에 기고한 글을 날줄 삼고, 그간 삶을 겪으면서 깨달은 것을 씨줄 삼아 최근에 《말의 품격》을 펴냈습니다. 한 권의 책은 수십만 개의 활자로 이루어진 숲인지도 모릅니다. 《말의 품격》이라는 숲을 단숨에 내달리기보다, 이른 아침에 고즈넉한 공원을 산책하듯이 찬찬히 거닐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기주 드림.

말의 품격(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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