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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삶은 예술 박기열 Mar 24. 2019

실패에 의해 살고 성공에 의해 죽는 삶

“예술가는 절제에 의해 살고, 자유에 의해 죽는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소설가 알베르 까뮈(Albert Camus)가 노벨 문학상을 수락하던  연설에서 한 말이다.

세상 누구보다 자유로워야 할 예술가에게 자유 때문에 죽을 것이고 절제만이 살 길이라니 이 무슨 이해 불가한 말인가 싶은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이해한다.

예술가는 누구보다 욕망에 충실한 사람들이다. 

내 안에서 웅성거리는 수많은 소리 중에 가장 솔직한 욕망의 소리를 콕 짚어 들을 수 있어야 하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당당히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욕망에만 이끌려 다니게 되면 욕망의 주인이 아니라 종이 되고 말 것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기에 욕망을 표면으로 드러내기 전까지 무수히 많은 사유와 고뇌에 몰두한다. 

그렇게 다듬어진 결과물을 세상은 작품이라고 부른다. 

같은 욕망이어도 이끌려 다니면 짐승이 되고 이끌고 다니면 예술가가 되는 것이다. 

평소 예술가들과 일상적인 대화가 어렵거나 뭔가 멍 때리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면 그때가 바로 예술가들이 사유와 고뇌에 빠져있는 순간일 가능성이 높다.


예술가의 책장. 박기열 作. 2016. 종이 위에 드로잉

 

만약 그런 예술가들의 실패담만 모아놓은 책이 있다면 대형서점 전체를 꽉 채우고도 남을 만큼의 방대한 양일 것이다. 예술은 수없이 반복된 좌절과 실패가 만들어낸 무한한 욕망과 상상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도예가인 나 역시 원하는 색상 하나를 표현하기 위해 수천 번의 실패와 반복을 경험해 봤다.

유약의 성분을 분석하고 원료의 비중을 0.01그램씩 미세하게 조정하면서 ‘바로 그 색’이 나타날 때까지 가마의 온도를 올리고 식히는 것을 반복하면서 말이다. 그러다가 끝내 성공이라도 하게 된다면 지난 실패의 힘들었던 기억들은 봄볕에 눈이 녹 듯 전부 다 사라져 버린다. 아니 사라진 다기보다 마지막 작품 속에 끝없이 노력했던 지난 과정들이 고스란히 담기면서 실패를 결과가 아닌 성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으로 새롭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자신의 인생에서 실패 하나쯤 갖게 된다는 것은 도전하는 과정 속에 많은 깨달음과 원숙함을 채워주니 부끄러운 게 아님은 물론이고 더 단단한 나로 만들어 주고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을 때 언제든 램프 속 지니를 불러내 듯 필요할 때마다 꺼내 볼 수 있을 만큼 축적된 자양분을 갖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실패를 우린 여전히 두려워한다. 

나이가 들면서 더 많은 지혜를 갖게 되는 우리지만 실패에 직면했을 때마다 수천 번 넘어져야 비로소 걸을 수 있다는 일생의 단순한 진리조차 떠올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너무 오랜 세월 성공한 사람들을 거울삼아 정답만을 향해 내달렸기 때문이다.

좋다는 대학, 좋다는 과에 입학시키기 위해 옆집 엄마가 좋다는 학원에 아이를 보내고 뒷집 아저씨가 좋다는 

곳에 땅을 샀었다.  또 좋다는 회사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청춘을 다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기꺼이 치열한 경쟁 속에 몸을 던지겠노라 결연한 다짐을 한다. 

그렇게 사람들이 좋다는 직장에 가고 좋다는 영화를 보고 좋다는 음악을 듣고 좋다는 카페엘 가는 것의 결과가 아이러니한 것은 그때 했던 선택의 대부분이 지금 시대에선 더 이상 성공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우리의 실패 중에 정작 온전한 나의 선택으로 인한 실패를 찾기 어려운데 그렇게 남의 선택에 의해 실패하게 되면 과정보다 결과에 집착하게 되고 특별한 개개인으로 성장할 수 없게 만든 이 사회에 분노할 수밖에 없다. 

개봉 영화의 별점을 찾아보지 않고 자신의 관점에서 스스로 영화를 선택하는 것, 

그것이 설령 박스오피스 순위 한참 밖에 있는 독립영화라 할지라도 아직 돈 맛을 못 본 감독의 거칠지만 신선한 시선에 우리 삶이 반응한다는 사실과 음원사이트가 정한 100위권 안의 음악을 무작정 자동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 가보지 못한 제3세계의 정제되지 않은 날 것의 음악을 들어보는 것. 

내가 살아보지 못한 시절을 살았던 작곡가의 음악을 몸으로 느끼며 단순함의 묵직함과 시대의 깊이에 손을 담그는 시도가 결국 우리 삶을 촉촉하게 해 준다는 사실 또한 잊어선 안 될 것이다.


남이 가보지 않은 길이 절대 실패로 향하는 길은 아니다.

아무런 정보 없이 오로지 내 의지만으로 선택해 비로소 어떤 것을 가졌을 때 결과와는 별개로 앞으로의 인생을 더 예민한 감각과 커다란 감정의 크기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오늘로 예측할 수 없는 또 다른 내일을 살 수 있게 될 거라는 믿음을 우린 가져야만 한다.  게다가 실패한다고 해도 내 의지로 결정한 것들이니 그 안에서 얻은 크고 작은 것들은 요술램프 속에 가득히 채워두고 필요할 때마다 불러내 소원을 말하면 된다. 


우린 평범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가 특별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 

세상 모든 사람은 각자가 정한 좋은 가치와 공정한 방식으로 성공을 누릴 자격을 이미 갖고 태어났기 때문에 요즘처럼 어지럽게 뉴스를 장식하는 성공해서 더 크게 실패한 나쁜 사람들의 말로를 관찰하면서 성공의 의미와 

가치를 재설정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어떤 이는 실패로 인해 좌절감을 느끼겠지만 긍정적으로 바라보면 실패는 간절함에 가깝다. 

우리가 실패를 받아들이고 경험의 한 부분으로 소중히 여긴다면 실패도 우리를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 줄 것이다. 그리고 실패에 감사하자. 까뮈가 예술가들에게 던졌던 화두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이 정말로 실패에 의해 살고 성공에 의해 죽을지 모르는 일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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