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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복치남편 Sep 19. 2023

너의 이름은

범덕이 할아버지가 지었다...

나은에게,


네가 평생에 걸쳐 가장 많이 들을 소리는 바로 ‘나은’일 거야. 이름이란 그만큼 중요하단다. 오죽하면 이름을 돈 받고 지어주는 작명소라는 곳이 있겠니? 사실 아빠도 이름을 잘 짓는다고 헛기침 좀 하는 사람이란다. 자동차에 애칭을 붙이는 가문의 전통은 바로 나로 인해 생긴 것이거든. 너희 엄마가 맨날 뭐라고 타박해도 은근히 마음에 들었던 게지.


비밀을 하나 알려줄게, 사실 아빠는 재동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 어릴 때는 친구들이 이름때문에 ‘재롱 피워보라’는 유치한 장난을 걸기 일쑤였고, 무엇보다 세월이 흘러 머리가 새하얀 할아버지가 되었을 때가 걱정이야. 감기에 걸려 병원이라도 갔다고 상상해보렴. 


“다음분, 재동 할아버지 들어오세요”


이라고 간호사가 말했을 때 덩치 크고 중후한 은발의 아빠가 일어나서 대답한다고 생각해봐. 그건 너무 웃길것 같지 않아? 더구나 나는 병원에서는 긴장해서 목소리도 가늘게 나오는데 말이지. 


그러다 이름을 바꿀 기회가 한번 찾아왔었어. 너도 언젠가는 알겠지만,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신비로운 힘에 의지할 때가 있단다. 그런 것 중에 이름에 따라 운명이 바뀐다는 주장이 있어. 네가 사회로 나갈 때는 좋아지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아빠가 사회생활을 시작할 무렵은 야만의 시대였단다.(라떼는 말야……) 


더구나 아빠는 출세라는 걸 하고 싶었어. 돈도 많이 벌고 유명해지길 바랐지. 그래서 무리하고 말았어. 매일 늦도록 일했고, 술자리 따라다니며 사내 정치라는 것도 했지. 몸과 마음이 아프고 나서야 아빠는 알게 됐어. 그 길은 나와는 맞지 않다는 걸 말이야. (나중에 기회 되면 개인의 행복을 위한 사내 정치 비법에 대해 알려줄게!)


그런 아빠가 안쓰러웠는지 희자 할머니는 새로운 이름을 선물하려 했단다. 세상 대부분 아들들이 엄마의 호의를 거절하듯이 아빠도 퉁명스럽게 안 한다고 했는데 말이야……

할머니가 알려준 새 이름의 뜻을 듣고는 조금 고민할 수 밖에 없었어. 

이름 뜻이 무려…… 사치로움을 누린다는 거지 뭐야.


아빠는 혹할 수밖에 없었어. 그때는 회사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어디서 돈벼락 안 떨어지나 기도하고 있을 때였거든. 하지만 재동이라는 이름으로 놀림을 버티고 산 삼십여 년이 너무 아까웠지. 만나는 사람들이 제정신 박힌 사회인이 된 이후로 아빠의 이름을 가지고 놀리는 이는 없었고, 오히려 개성있는 이름이라서 도움이 될 때가 많았거든.


너의 이름을 짓는 것은 엄마 아빠 인생 최대의 고민이었단다. 그림 나은 엄마


자 이제 너의 이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게, 우선 너의 이름은 범덕이 할아버지가 지어준 거야. 할아버지는 자칭 타칭 우리나라에서 제일가는 한문 박사란다. 너를 정말 사랑하는 분이기도 하지. 그래서 이제껏 공부해오신 모든 노력을 담아 너의 이름 후보 4개를 엄마 아빠에게 주셨어. 


엄마 아빠는 좀 의아했어. 할아버지가 네 엄마를 좋아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아빠와 결혼해줘서일거야……), 후보로 준 이름이 네 엄마의 이름과 비슷했기 때문이야. 범덕이 할아버지 말로는 좋은 뜻이 있어서 그런 거래. 아무튼 그 4개의 이름 중에 선택한 것이 바로 나은이야. 


아름답다는 뜻의 나(娜)에 좋아진다는 뜻의 은(殷)이 합쳐진 거래.

나중에 고모는 아마도 할아버지와 할머니(실제 보스)는 나은이라는 이름을 정해둔 게 아니냐는 추리를 펼쳤단다. 후보로 준 이름 중에 나은이라는 이름이 단연 예뻤거든. 뭐 그게 사실이어도 상관없단다. 무신론자인 아빠도 이성적인 엄마도 네게 도움이 된다면 성명학이건 뭐건 다 합쳐 그중에 제일 좋은 이름을 지어주고 싶은 마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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