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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샤인 Dec 18. 2022

구원받은 바리새인

예수님의 천적 바리새인들. 왜?

마태복음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나오는 바리새인과 예수님의 충돌을 보면 심란하다. 왜? 그들은 누구보다도 기도와 금식과 구제에 열심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 잘 살아보고 싶은 열심이 가득한 사람들이란 말이다.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실 정도로 예수님에게까지 그 열심은 인정받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무엇이 그들을 눈을 가린 것일까?


복음서를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나는 세리와 죄인들의 입장보다는 바리새인의 입장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그말인즉슨, 내가 예수님을 대적할 수 있는 입장에 서기가 상대적으로 더 쉽다는 말이다. 이 문장을 적으면서도 참 두렵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먼저 바리새인들을 향한 예수님을 평가를 잘 정리해놓은 글이 있어 가져와본다:


예수님께서 평가하시는 바리새인들은 회칠한 무덤이고, 말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이며, 눈먼 안내자이고, 독사의 자식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면서 사람도 잃고 하나님도 잃었다. 그들은 터져버린 낡은 가죽부대가 되었고, 전통과 하나님을 맞바꾼 바보였다. 안식일을 주장하다 안식일의 주인을 무시했고,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없으면서도 대접받기 위해 아는 척하고 있는 척했다. 자신들의 방법 외에는 인정하지 않았고, 도무지 소통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수군거림으로 성령을 훼방했고, 정작 하나님의 뜻을 말해야 할 때 자신들의 이익을 포기할 수 없어 침묵했다. 자기만 깨끗하면 된다는 이기적인 성결 주의자들이었고, 불타오르는 분노를 쏟아내기 위해 손에 돌을 들고 허물이 있는 사람을 찾아다니기에 분주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통해 당신의 뜻을 보여주셨지만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거절당하면 이를 갈았다. 자신들을 거절한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어도 죽이려 했고 결국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 박았다. (https://brunch.co.kr/@taebarii/50)


이러한 문제들의 뿌리가 되는 근원이 무엇일까 생각하며 기도해 보다 보니 떠오르는 한 가지가 있었다:


바로 ‘나의 의’다.


나의 의가 이들이 가지고 있었던 근본 문제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나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것이 깨달아지며 내 안에 깊은 회개가 일어났다. 눈물로 나의 의를 자복하고 다시 하나님의 의를 덧입는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곧이어 이어지는 깨달음은 이러한 나의 의는 한 번 회개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회개함으로 깨끗함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나의 영,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나의 영과는 달리 아직은 이 세상의 지식과 관습, 또 관성이 남아있는 나의 혼과 육은 매일같이 예수의 피를 뿌려 거룩하게 하지 않으면 끊임없이 번식하는 바이러스와 같은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하지 않았는가.


사단 입장에서는 성도를 ‘바리새인화’ 시키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공격 수단이다. 이이제이. 적을 적으로 제압한다는 말이 바리새인들에게 그대로 적용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친히 주신 그 말씀이 오히려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지 않았는가. 무서운 일이다. 정말 두려운 일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리더들에게 그렇게 엄격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모세가 므리바에서, 그것도 딱 한 번,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다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신 것을 보며 저렇게까지 하셨어야 했나 생각을 했었는데 하나님의 의와 자신의 의가 경계선에 있는 사람일수록 하나님께서 단호하게 꾸짖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모세는 그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다고 기록할 정도였으니 모세가 교만해지는 건 한순간이었을 테니까.


하나님을 향한 믿음, 그리고 그 믿음으로 행함과는 별개로 나는 죄성을 가진 인간이기에 하나님의 뜻을 잘못 해석할 수도 있고 실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매일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의 의는 절대 완전하지 못하며 오히려 나를 옭아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다. 하나님의 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에야만 완전해진다는 진리를 끊임없이 주입해야겠다.




그럼에도, 나에게 소망이 있음은 모든 바리새인들이 다 망하진 않았다는 것이다.


마태복음을 읽으며 심란해하며 하나님께 ‘구원받은 바리새인들이 있기는 합니까?’ 하고 탄식하는데 그 순간 바로 생각나는 인물이 있었다:

바로 사도 바울이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빌 3:5)


생각해보면 바울은 정말 ‘자기 의’와 ‘하나님의 의’라는 두 극단을 모두 경험한 인물이다. 자기 의에 비추어 봤을 때 예수교는 이단이었고 하나님을 위해 이단 퇴치 작전을 기획하고 자신이 직접 선봉장이 되어 그리스도인들을 소탕했다. 하지만 그 마음의 중심을 하나님이 아셨으리라. 다메섹에서 예수님은 바울에게 직접 찾아가셨고, 그의 눈을 멀게 하심으로 그가 영적으로 눈먼 것을 깨닫게 하셨다. 그 이후 아라바 광야에서의 3년의 시간 동안 바울은 인생의 키를 재조준하는 작업을 하였고 하나님의 의로 거듭난 자가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사람은 자기 의에 사로잡힐 위험이 크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의에 사로잡힐 때에 놀랍게 쓰임 받는다는 것을 바울의 삶을 통해 목격한다. 


나의 의가 매일같이 꺾여지고 

하나님의 의가 드러내는 삶이 되도록 매일 회개하며, 

성령의 충만함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

나를 통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도록 기도해야겠다.


최근 몇 년간 겪었던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서 나의 의를 꺾으시는 기간이었음을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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