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끝이 시린 초겨울, 연남동 골목을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한참 걷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지나버린 시간과 우리가 맞이한 계절, 연애에 관한 이야기까지 마음속을 훌훌 털고 온 밤. 겉은 찬데, 속은 열띤 시간을 보낸 탓인지 나는 속에서 뭔가 끓는 것만 같았다. 아마 그날 밤 무슨 일이라도 생기길 간절히 바랐는지도 모른다.
집 근처 역에 도착해 출구를 나서던 중, 계단을 오르며 까만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희끗한 것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하얗고 작은 것이 폴폴… 아, 첫눈이었다. 덜 익은 겨울에 찾아온 여린 눈이었다. 내가 태어난 날 즈음에는 자주 첫눈이 왔다. 지금은 생일을 한 시간 앞둔 시점이었다. 실제로 내가 태어나던 날에도 아빠는 나를 만나기 위해 첫눈이 펑펑 쏟아지는 대관령을 굽이굽이 달려왔다고 했다.
이 순간이 작은 선물처럼 느껴졌다. 사진으로라도 남기고픈 마음에 몇 걸음걸음마다 멈춰 서서 하늘을 바라봤다. 문득 이 작은 눈이 얼마나 높은 곳에서 출발해 이곳까지 닿은 걸까 생각하자 마음이 아득해졌다. 첫눈을 마주치면 함께 하고픈 누군가가 떠오른다. 사람을 달뜨게 만들고 계속 바라보고 싶게 하고, 희미해질수록 더 간절해지는 게 사랑과 조금 닮아서일까. 어딘가에서 출발한 마음이 어느덧 여기까지 온 것이다.
첫눈이 오면 나는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싶어 진다. “지금 첫눈이 와요. 봤어요? 생각나서 연락했어요.” 이런 식의 어수룩한 말이라도 걸고 싶어 진다. 나는 당연히 그를 떠올렸다. 하지만 나는 차마 그에게 연락하지 못했다. 그가 있는 곳은 내가 있는 곳처럼 늦은 밤도 아니고, 같은 풍경을 볼 수도 없었다. 눈처럼 오래 날아도 닿기 어려울 만큼 먼 곳에 있으니까. 나의 마음이 전달되기에는 시간과 거리 모두 너무 멀었다.
그가 타지로 떠난 지 벌써 1년 반의 시간이 흘렀다. 최근 몇 주 동안 그는 바쁜 일이 겹친 나머지 하루에 한 번 연락하는 것도 어려워졌고, 점점 연락이 뜸해지다가 며칠간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상태가 됐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도대체 얼마나 바쁘기에 연락 한 통 할 시간도 없는 건지 의문이 더해갔고, 혹여 마음이 멀어진 건 아닐까 하는 걱정에 악몽을 꾸는 일도 잦아졌다. 불안한 마음을 전하면 한 참 뒤에 ‘너무 바빠서 정신이 없다’는 대답만이 돌아왔다.
연락을 안 하는 동안 생각이 많아졌고 답답했다. 나만 놓으면 끝나는 건 아닐까. 장거리 연애의 애매한 이별이란 이런 걸까. 사랑은 한 사람을 위해 지구 반대편으로 열여섯 시간을 날아가게 만들기도 하고, 연락 한 통을 큰 과제처럼 느껴지게도 만드는구나. 하지만 나의 감정만을 내세워 재촉하고 다그치는 건 싫었다. 서운한 마음이 솟구칠 때마다 하고픈 말을 꿀떡꿀떡 삼켰다. 눈이 쌓이듯 그에게 하지 못한 말들이 쌓여만 갔다.
첫눈을 보자마자 덜컥 그에게 연락을 하고 싶어 졌다. “여긴 첫눈이 와요. (당신이 생각나서 연락했어요. 첫눈을, 나의 생일을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을 그댄 알까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우리의 관계, 이대로 괜찮은 걸까요?)”
그날 밤, 눈은 금세 그쳤지만 그를 생각하는 마음은 전혀 그쳐 지질 않았다. 나는 결국 그에게 하려던 말을 하지 못했다. 그저 첫눈처럼, 아주 먼 곳에서 출발한 나의 마음이 그에게 흩날리기만을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