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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내 INAE Apr 29. 2021

AI가 글쓰면 난 뭐하고 살지?

[사적인 리뷰]『번역가 K가 사는 법』김택규 지음.

(표지 사진 출처. yes24 카드뉴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학보사에 입사했던 2015학년도 2학기. 막 수습기자를 벗어나 정식으로 학술부에 발령받아 처음으로 쓴 기사는 로봇저널리즘에 관한 것이었다.


<로봇 기자의 출현, 저널리즘의 혁신이 될 것인가>

빅데이터 활용해 정보전달은 신속하나, 직업 윤리의식과 공정성 결여돼


첫 기사였고, 당시 부서별로 깊이 있게 교육을 받아 체계적인 분류 과정을 통하기보단 수습들의 개인적 성향과 관심사, 문체 스타일, 그리고 각 부서별로 인원 충당이 필요한 우선순위를 고려해 부서를 발령했기 때문에, 각 부서 중에 어느 곳을 가고 싶은지도 모를 정도로 학술부 기자로서의 아이덴티티가 전무했다. 그래서일까, 그 당시 쓴 기사는 고사하고 편집자주부터 읽어보면 아주 가관이다.


  로봇이 인간과 취업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이야기는 오래 전부터 화젯거리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사람과 로봇이 일터에서 나란히 일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고 분석했다. 그중에서도 명확한 공식에 따른 규칙적인 업무, 즉 단순반복 업무일수록 인간의 자리를 로봇이 대신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그 대표적인 직업 중 하나가 바로 기자다.
  현재 미국과 영국에서 로봇 기자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때문에 미래학자들은 약 2018년이면 두 나라의 종이신문이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로봇 기자의 출현을 디지털 저널리즘의 혁신으로 보며 생겨난 말이 '로봇 저널리즘'이다. … 이에 본지에서는 로봇 저널리즘에 대해 학술적으로 탐구하고 진정한 저널리즘은 무엇인가 고찰해보고자 한다.


이 편집자주는 대단히 문제적이다. 첫째, 인용부터 잘못됐다. '기자 대신 기사를 쓰는 로봇에 저널리즘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듯하더니 인용하기를 '미래학자들이 조만간 종이신문은 사라질 것'이란다. 로봇기자가 인간기자를 대체할 수 있는가와 신문의 플랫폼 변화에 대한 질문은 엄연히 다른 영역이다.


둘째, '단순반복 업무일수록 인간의 자리를 로봇이 대신할 가능성이 높고, 그 대표적인 직업 중 하나가 바로 기자'라니. 일반적으로 기자가 지닌 이미지라 함은, 인터뷰와 자료 수집 등 취재과정을 통해 정보 전달의 목적을 가진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편집자주를 줄이는 과정에서 중간내용이 생략된 것으로 보이지만, 일반적인 기자의 이미지를 가진 독자의 경우 의아한 부분일 수밖에 없으므로 더 분명하게 이 '대표적인 직업'의 이유를 설명했어야 했다. 아니면 '단순반복 업무일수록 인간의 자리를 로봇이 대신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대표적인 직업 중 하나로 기자가 꼽힌다고 한다'처럼 독자의 의아함을 호기심으로 전이시킬 수 있도록 써야하지 않았을까.


확실히 말해둘 점은 당시 본문에서도 명확히 선을 그었던 바이지만, 로봇이 대체하고 있는 저널리즘의 분야는 저널리즘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할 단순보도형 기사에서였다. 그 예로, 2009년 개발된 기사 자동 생산 소프트웨어 '스태츠 몽키(Stats Monkey)'를 들었는데, 주로 지역 리그 야구 경기 뉴스를 생산하는 이 로봇기자는 웹에서 정보를 실시간으로 수집한 후 수집된 데이터를 통해 경기의 진행 상황을 분석하고, 이를 소프트웨어 내 기본 문장에 입력하면서 순식간에 기사 한 편을 완성한다. 즉, 인간이 할 수 없는 방대한 양의 데이터 수집·분석·축적 능력과 인간이기 때문에 생길 수 있는 오판에 대한 보완을 로봇에게 맡길 건 맡기고, 기자로 하여금 분석기사나 인터뷰 등 깊이 있는 기사 작성에 집중할 시간적 여유를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이 '로봇저널리즘'이지 않을까? 라며 질문을 던졌었다.


이참에 오랜만에 첫 기사를 읽어봤지만 누가 봐도 '첫 기사'구나 싶게 못 썼다. 그래도 마지막에 '결국 현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저널리즘 앞에 무슨 단어가 붙느냐가 아닌 저널리즘 그 자체의 가치를 되찾는 것이다'라고 단 논평은 좀 괜찮았다고 인정해주고 싶다. (내 맘인데 뭐)


이때 나는 이 기사로 취재후기까지 쓴 바 있다. 그때 쓴 제목이 '로봇이 기사 쓰면 나는 뭐하지?'였다. 물론 기자로서의 꿈은 없었고, 순전히 어릴 적부터 가지고 있었던 출판편집자를 향한 진로적 욕망에 이 학보사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입사한 것이었지만, 첫 기사로 만난 이 문장은 이후로도 글을 쓰고 있는 나에게 꽤나 상징적인 문장이 됐다.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여전히 글을 쓰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로봇이 기사를 쓴다면 뭔들 못 쓸까? 2016년 일본에서는 인공지능이 쓴 소설 「컴퓨터가 소설을 쓰는 날」이 일반 작가들과 경쟁해 1차 심사를 통과한 바가 있었다. 이젠 소설도 인공지능이 쓴다. 물론 이 당시 기사를 보면, '아직은 인공지능 스스로 스토리까지 만들어낼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전체적인 방향과 흐름 등 80% 정도는 인간의 손이 들어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상황에 적합한 단어를 선택, 문장과 단락을 완성하는 식으로 쓰여졌다던 이 소설에 대해 전문가들은 '인공지능이 의미있는 문장을 이어 단편소설을 완성한 자체가 큰 성과'라고 평가했다. 더 발전했다간 정말로 소설 하나를 인공지능이 통째로 쓰는 시대가 올 지도 모른다. 아주 무섭지 않은가.


다른 분야는 몰라도 감성과 창의력, 그리고 존엄성에 대한 인간만의 철학이 필수인 인문학과 예술계에서는 기계가 인간을 대체할 수 없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이 소설 쓰는 인공지능을 보아라. 2018년에 인공지능이 1만5천 개의 그림을 학습한 뒤 그렸다던 그림 '에드먼드 데 벨라미'가 경매에서 우리 돈 약 5억 원에 팔렸다. 욕심 많은 이과놈들(죄송합니다)이 계속해서 만들 글 쓰고 그림 그리는 인공지능들을 보아라.


기계 습격(또는 이과)에 대한 나름의 공포를 경험하고 있는 한 명의 국문학도이자 작가지망생이기에 더욱 이 책에 끌렸는지도 모르겠다. 책의 뒷표지에는 이렇게 언급되어 있다.


전작 『번역가 되는 법』에서 출판번역가의 미래가 암울할지라도 '고분고분 죽을 마음이 없다'고 일갈했던 번역가 K가 돌아왔다. 인공지능의 습격 앞에서 조만간 사라질 직업 1위로 꼽히는 번역가. 하지만 번역가 K는 여전히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고 선언한다.


책의 앞표지 (사진 출처 : yes24)


아마도 위의 문구는 편집자주일 테지만, 저자의 문체는 편집자 만큼, 아니 훨씬 더 단도직입적이면서도 본인만의 독특한 유머를 뽐내고 있다. 우선은 책 자체가 스타일리쉬한 이유도 저자의 이 같은 성격을 따른 것 같다. 본문의 종이 두께가 상당히 두껍기도 하고, 에세이 도서를 오랜만에 읽어서 잘 모르는 눈치인지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폰트는 아니었다. 훨씬 얇고 단단해 보이는 폰트였다. 번역가 K로 보이는 캐릭터의 네 개의 손이 각각 책과 타자기, 펜과 가방을 들고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던가, 타자기와 책 사이에서 발을 쾅쾅 거리고 있는 앞뒤 표지를 보면 적어도 번역만 하는 번역가의 이미지는 아니구나 싶다.


이들 이유 때문에 책을 스타일리쉬하다고 말하는 게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독자로 하여금 겉으로 보기에도 접근성이 좋은 책이다? 만만하게 읽기 좋아 보인다? 이런 말들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 책과 저자만의 스타일이 충분히 매력적이다.


앞서 기계의 출현으로 인해 위협받는 인문학도들의 공포를 말해왔고, 이 책 또한 이 점을 중점으로 마케팅을 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이 책을 읽어보면 인공지능 앞에 이대로 죽을 수 없다는 결의에 찬 번역가보다는 책 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하는 한 남자가 아버지의 지시에 이끌려 중국어과에 입학하고, 중국 자체에 의미도 흥미도 없었지만 편입을 하기엔 영어 같은 시험공부로 시간을 허비하기 싫다는 이유로 그냥 대학원에 진학한, 자기 고집이 있으면서도 큰 뜻 없이 무심하고 건조한 글쟁이가 보인다.

그러다가 마침내 졸업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목전에 닥쳤다. 당연히 나는 취업을 위한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았고 취업할 마음도 없었다. 그저 지금 같은 '문화 백수'의 삶을 어떻게 합법적으로 연장할 수 있을까, 하는 바람뿐이었다. - 19쪽.


아주 와닿는 대목이지 않은가. '문화 백수'. 부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 월급을 꾸준히 받고 싶은 간절함, 월급만으론 안 된다는 일확천금의 꿈 등은 없다. 그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나만의 시간을 오래도록 가지고 싶다는 소박한 희망이 잔잔하게 들이치는 파도처럼 가슴을 톡톡 건드릴 뿐.


쓸쓸한 가을 풍경 속에 홀로 공원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 고독한 문학청년의 책에, 그렇다면 왜 '이대로 죽을 수 없는 출판번역가의 생존기'라는 장엄한 타이틀이 붙은 것일까? 그건 저자가 내내 '출판번역가'라고 명명하는 이유에 있다. 특히 그가 중국문학번역가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고, 그것이 이 책이 가진 신선함이라고 생각한다.


중국문학은 사실 관심 밖의 영역이다. 아는 작가도 전공강의 시간에 잠깐 배운 「광인일기」의 저자 루쉰 밖에 없다. 중국인이 쓰는 소설이라고 해도 그 이미지가 좋게 박혀 있지도 않다. 공산주의 국가에서 잔뜩 검열을 당해 나온 소설일 테니 현 정부에 대한 찬양이나 사회주의 담론 같은 고리타분한 이야기만 담겨있지 않을까. 이 책에서도 그러한 언급은 나온다. 팔리는 중국책은 거의 고전처세술이나 역사서에 국한되었고, 중국소설은 손익분기점을 넘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국내 출판계에 협소한 중국문학의 길을 열기 위해 기꺼이 기획자의 길도 걷는다. 그는 자기 손으로 직접 번역하고 싶은 작품을 찾고, 어울리는 출판사를 찾아 기획서를 작성한다. 중국문학에 훤한 저자의 안목과 능력을 살려 김영사의 중국법인 설립을 위해 특별채용되기도 했으며, 최근에는 종이책을 넘어 중국의 웹툰과 웹소설도 국내로 수입되기 시작해 그가 할 일은 더욱 많아졌다. 일방적으로 일감을 의뢰받는 프리랜서 번역가를 넘어 자신이 원하는 작품을 번역하기 위해 발로 뛰는 기획자이자 출판사로부터 신임을 얻기 위해 수정이 필요없을 정도로 말끔히 원고를 번역하는 편집자의 역할까지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그냥 번역가가 아닌 '출판번역가'라고 말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내가 이런 방식으로 한국에 중국소설을 들여오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만큼 그가 보기에 국내 독자들이 다른 나라의 작품만큼 유의미하게 읽었으면 하는 작품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중국작가가 쓴 작품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을 나는 류얼시의 『서점의 온도』와 왕웨이롄의 『책물고기』를 영업당했다. 이미 출판계에서는 중국 정부의 해외번역지원 사업에 따라 지원금을 받고 중국 작품을 출간한다고 하는데, 명색이 출판편집자가 되고 싶다면서 이러한 실정을 몰랐던 나를 반성하게도 됐다. 심지어는 중국 특성상 검열과 통제를 받는 작가들이 있다는 사실을 읽고 세계 정세를 일방적으로만 받아들여선 안 되므로 영어와 함께 중국어도 공부해야겠다는 또 하나의 원대한 목표를 갖게 됐다.


그렇다면 왜 이 책은 '인공지능의 습격 앞에서 조만간 사라질 직업 1위로 꼽히는 번역가'를 앞세우는 것일까? 그리고 왜 저자는 이러한 습격에 전혀 겁을 먹지도 않고 당당한 것일까? 그것은 다음의 글을 읽으면 알 수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번역할 때 "번역을 하고 있다"는 느낌보다는 "글을 쓰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중국어를 한국어로 변환하고 있는 것을 의식하기보다 중국어가 내 머릿속에 각인해놓은 심상을 내 글로 자유롭게 풀어내는 데 집중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번역한 텍스트는 원작자의 것이 아니라 나의 것이다. … 나는 비록 번역가이지만 온전히 내 모국어로 호흡하고 내 모국어 안에서 자유롭다. - 22,23쪽


통역도 마찬가지지만, 번역을 한다는 건 단순히 외국어를 모국어로 바꾸는 작업이 아니다. '초월번역'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니다. 외국어를 사용하지만 소비층은 필수적으로 국내에 국한되기 때문에 같은 모국어를 구사하더라도 역자는 훨씬 뛰어난 모국어 실력을 습득해야 한다. 원문의 분위기와 문체를 그대로 살리면서도 현재를 살아가는 국내독자들의 입맛에 맞도록 번역을 해야 하는 것이 기본이기 때문이다.


AI의 번역이 서툴고 투박하더라도 일단 AI로 번역을 돌리고 그 결과를 가지고 인간이 윤문을 하는 등 감수를 하면 되지 않느냐고 해도, 저자는 '배경 지식과 섬세한 뉘앙스가 요구되는 문학번역을 비롯한 출판번역'이라고 못을 박는다. 아무리 AI의 번역이 발달되고 있고, 언젠가 AI 번역기만으로 서로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할 수 있을지라도 그 누구도 AI 번역기의 번역을 100퍼센트 신뢰하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AI는 작가와 문장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단지 문장과 문장 사이의 규칙만 배울 뿐이다. 여느 소설이나 영화 등에서 인간의 감정을 습득한 AI가 정말로 탄생하지 않는 이상 AI가 작가의 가치관과 삶이 녹아든 문장의 의미를 이해할 수는 없다.


무심하고 건조하게만 보였던 저자가, 문화 백수의 꿈을 조금이라도 연장하고 싶은 사람으로만 보였던 저자가 작품 전반에 이르러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고 선언하는 출판번역가'의 엄숙하고 투쟁적인 생존자로 보이게 되는 건 바로 그 무심함에서 오는 꿋꿋함과 문화 백수를 꿈꿀 정도로 글을 사랑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AI가 글을 쓰면 난 뭐하며 살까? 그 질문에 답은 너무도 간단하다. AI가 쓰지 못하는 글을 쓰면 된다. 그러기 위해 AI가 절대 넘보지 못하는 영역을 향해 꿋꿋이 나아가는 용기와 집중력,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글을 놓치지 않는 진실된 사랑이 필요하다.





책의 아쉬운 점


3부에 꽤 많은 편집적 오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우선 3부 번역 이야기의 모든 본문 꼬리말에 3부 기획 이야기라고 써있었고, 큰따옴표의 시작과 끝이 어느 순간 뒤바뀌어 162쪽부터 여는 큰따옴표가 두 번 쓰이더니 그 다음부터 여는 큰따옴표가 뒤에, 닫는 큰따옴표가 앞에 오기 시작했다. 이런 어설픔도 맛이라면 맛일 수 있겠으나 신경을 안 쓸래야 안 쓸 수가 없는 부분이었다.


그만큼 1부 나의 이야기가 다른 두 챕터보다 더 재밌었던 것을 방증하는 것이 아닐까도 싶다. 1부에서의 과감한 인생사와 운과 실력으로 기회를 놓치지 않는 출판번역가이자 기획자로서의 모습이 상당히 매력적이어서 오히려 2부와 3부에서 힘이 빠진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나마 2부에서 소개되는 출판사와 중국 현대문학 작가들 자체의 이야기가 매력적이어서 여기까지는 읽겠다. 하지만 3부에 이르러서는 번역에 대한 디테일한 업무를 소개하는데, 이는 번역에 꿈이 없는 개인적인 소견으로 별로 흥미로운 부분이 아닐 뿐더러 내용보다 자잘한 편집 실수에 더 눈길이 갔다.


그리고, 1부와 2부는 에세이 형식을 띠지만 3부는 철저하게 저자가 지금껏 체득한 번역 요령을 정리하고 번호를 매겨 보이는데, 아마도 이것은 출판사 '더라인북스'의 특성에 따른 것이 아닐까 예상해본다. 더라인북스 공식 블로그에 소개된 글을 보면 번역과 책, 문화를 잇는 하나의 라인! 글 쓰는 번역가들을 중심으로 영화와 책, 공부, 글쓰기 이야기를 합니다라고 하고, 이를 중심으로 번역 능력과 글쓰기 능력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는 '더라인아카데미'와, 여기서 실력을 쌓은 번역가들을 영상번역에 투입시키는 '더라인미디어'가 운영 중이다. 즉, 더라인북스라는 출판사 자체가 번역과 글쓰기 교육에 관심이 많은 회사로, 어쩌면 그래서 이 책에도 출판사의 성향에 따라 작가의 번역 요령 파트를 따로 할애한 것 같다.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이 책이 예비번역가들을 위한 번역 요령서인지, 아니면 한 번역가로서 살아온 삶에 대한 에세이인지 성격이 모호해졌다. 분명 800번대 문학 서가에서 찾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000번대 총류 서가나 700번대 언어 서가에 꽂혀도 이질감이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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