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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VA Feb 08. 2023

모든 도구는 최초에 만능이었다

만능 도구 하나로 미니멀리즘 실천 중입니다

달방에 들어올 때 챙긴 부엌살림은

커피 기계와 우유 거품기, 전자레인지와 전기 포트다.

먹고살자고 챙겼는데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면  어설프다.

전기밥솥도 아니고 프라이팬도 없으니

이 기계들만 보면 집에서 뭘 만들어 먹겠다는 의도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나의 인스타를 혹시라도 방문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난 카푸치노를 무지 좋아한다.

그것도 시나몬이 없는 누드 (?) 카푸치노를 말이다.

아침에는 에스프레소 투 샷에 우유거품 잔뜩 올린

사발만 한 카푸치노가 필수다.

20년도 전에 의사가 혈압이 낮은 나에게 내린

생활 처방이었다.

그 덕에 카페인 중독이 되었음에 틀림없는 나는

커피 없는 아침을 상상할 수가 없다.

요양원에 들어가는 때가 오면

그때도 커피 기계를 일 순위로 챙기겠다고 할 정도다.


그래서 달방으로 이사 오기 전날,

멸균 우유를 달방으로 주문했다.

그리고 이사 온 다음 날 눈 뜨자마자

습관적으로 우유 거품기로 우유 거품을 만들고

커피 기계로 커피를 내리려 했는데

엄마야, 이번에는 컵이 없네....


내 살림살이에는 밥그릇 접시보다

더 많은 게 커피 컵이건만,

딱 한 달 만이라도 달방에서는

철저하게 미니멀리즘을 실천하기로 맘먹었는데

또 살 수는 없다. 그럼 카푸치노는 어디다 마시지?


그래, 우유 거품기 통에다 마시자.

평소에 사용하는 컵이 2배 커졌다 생각하면 그만이다.

멋과 분위기를 완전히 걷어낸

생존과 필요와 실용의 관점으로만 보면

훌륭한 해결책이다.


거품기 통을 컵으로 사용하면  

거기에 카푸치노를 마시고 포트에 물을 끓여

보리차를 마실수도 있다.

화분에 물을 줄 때도

그 우유거품기 통에 수돗물을 받아서 주면 된다.

우유 거품기 통은 나의 커피 컵이자,

보리차 컵이자, 화분용 물컵으로 만능이 되었다.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면서 비로소 인간이 된다.

도구를 만들어내는 건 상황 속에서

결핍과 필요를 찾아낸 것이고

그 결핍과 필요를 채우기 위해 도구를 고안해 냈다.

본능에만 이끌려 산다면 결핍은

오직 생존 본능에 관련된 욕망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면서

효율과 편리를 깨닫게 되고

그러면서 점점 도구는

다양화되고 세분화되어 발전한다.


최초의 도구는 만능이었음에 틀림없다.

만들어진 도구로 여기도 저기도 사용해 보다가

필요가 또 생겨나고그 최초의 도구에서

자르고 붙이고 뒤틀어 바꾸어 만들어 보면서

상황과 필요에 맞는 도구들이 계속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새롭게 발명되고 진화 발전하는 도구들은

인간에게 너무나도 편리한 생활을 안겨주면서

정말 대단하다 여겨지기도 했지만

지금은 어떤 새로운 물건이 나오면

정말 저게 쓸모가 있는지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얼마나 많은 도구와 사물에 치여 사는지...


없으면 안 될 것 같아 ’어머, 저건 꼭 사야 해 ‘ 했던 것들은

대부분 마케팅의 유혹에 빠진

나의 얕은 욕망을 확인한 것뿐이었다.  


외국 기숙사에 있을 때도 난 컵 하나로 시작했었다.

거기에 커피도 물도 와인도 보리차도 마셨는데

지금 내 살림에는 에스프레소, 라테, 카푸치노, 아메리카노 커피용 컵이 다 따로 있고

술잔만 해도 레드 와인, 화이트 와인, 샴페인, 위스키, 코냑 등 다양한 유리잔들이 있다.


지금 우유 거품기 통 하나로

물도 마시고 커피도 마시고 조만간 맥주도 따라 마실 텐데

컨테이너에 있는 그 잔들은 도대체 다 뭐란 말인가...


거기다 칼은 또 뭐 그리 다양한지,

잘 쓸리기만 하면 그만인데

칼 세트 시작이 벌써 기본 4-6개고 거기에

과일칼, 양배추 칼, 다지기 칼, 피자칼, 빵칼, 케이크칼까지

음식마다 다르게 사용할 수 있는

날카로운 칼에서 무딘 칼까지 다양하다.

이곳에서는 가위 하나로 다 해결할 수 있는데 말이다.


수저와 젓가락을 사면서 가위도 사 왔다.

특별한 필요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가위는 두면 정말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거라는

살림의 ’ 짬‘에서 나온 거다.

아니다 다를까, 가위는 정말 요긴하다.

부엌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안 쓰이는 곳이 없다.

부엌에서는 음식을 자르는 것은 물론

모든 포장을 뜯고 다시 할 때 만능 도구 탑 1위다.

손톱이 잘 가라지는 나는 가위가 없으면

택배 포장도 잘 뜯지 못해서

가위를 책상과 부엌 싱크대에 늘 두고 사는데

이번에도 가위를 구매한 건 정말 탁월했던 거 같다.

여담으로 컨테이너 살림 속에 가위가

내가 기억하기로는 10개도 넘게 있다.

부엌용 4개에 문구용 6개 정도 되니

거기에 하나 더 늘어났네.    


시장은 수요를 만들어 내고

소비자는 그걸 보고 결핍을 느낀다.

반대로 시장은 소비자들의 수요의 빈틈을

공략한다고 말한다.

소비자의 필요와 결핍을 채워주는 제품만이

시장성이 있다고 판단한다.

이렇게 시장과 소비자의 찰떡궁합으로

이 세상에 나온 물건은

그런 결핍이 없었던 소비자들에게도

있어야 할 것처럼 느껴지게 유혹한다.

소비재가 유행을 타고 트렌드가 되면서

대박 상품이 되는 거다.      


컵 하나만 있어도 살 수 있었던 내가

물건과 도구의 노예가 된 것도 이런 맥락이었다.

좋아 보이고 편해 보이고 없으면 불편할 것 같은

효율과 불편을 동시에 알려주는 상품들의 유혹에 넘어가

계획에 없는 소비를 하고

다음 달에는 하지 않겠다고 맘먹어도

결국 마트로 달려가거나 구매 버튼을 눌러

욕망을 분출하고 불안과 긴장을 해소한다.

시장의 유혹에 언제나 넘어가 버린 판매자 입장에서는

충성 고객이었다.


’그 판에서 누가 호군지 모르면 그 사람이 호구인겨 ‘


충성 고객은 다른 말로 하면 호구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늘어 나는 살림 속에서 흐뭇해하던 나는

마케팅 판의 진정한 호구 아니었을까...


물론 그렇게 넘어간 덕분에 생활은

편리하고 여가 시간도 늘어났고

살림도 반짝거리게 되었지만

이사를 오고 가면서 살림을 보면

이걸 내가 왜 샀지? 이게 왜 필요하지?  싶었다.  


텅 빈 엉터리 살림의 달방에 있으니 참으로 홀가분하다.

기억조차 나지 않는 상품의 필요와

시장의 유혹이 허무하기까지 하다.

없어도 살아지는데

왜 그리 절박하게 시장에 끌려 다녔을까?      


엄마는 다 때가 있다고 했었다.

살림을 시작할 때는 알뜰살뜰 안 쓰고 모으는 재미가 있고

살림이 늘어날 때는 또 살림 늘리며 쓰는 재미가 있고

나이 들면 이제는 그 살림이 버거워

버리고 나눠주는 재미가 있다고 했다.


이 달방 생활을 끝내고 다시 내 집으로 들어가면

진정한 미니멀리즘을 실천하겠노라 다짐한다.

환경이나 기후를 생각하는

거국적인 사회적 이념이 있는 건 아니다.

그저 물건에 치여 그걸 정리 정돈하는 시간과 에너지가 아까운 거다.


이제는 내 몸 하나만 관리하면 그만인

그 시기가 다가오는 것 같다.

소유를 책임지고 관리하기보다는

존재가 나의 관계에 좀 더 가까워지기 위해

나이 앞자리가 바뀌는 지금 나에게

미니멀리즘은 선택이 아닌 필수인 것이다.

수동적인 미니멀리즘에서

적극적인 간소한 라이프 스타일을 위해

달방의 25일 예행연습 기간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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