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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VA Feb 10. 2023

시간과 공간만 남았네

무엇을 채울까? 아니 채워야 하나?

반지하 달방 살이 1주일 차,

반지하에 대한 편견이 완전히 무너졌다.

조용하다. 게다가 아늑하기까지 하다.

부모님 덕분에 어린 시절에는 지상층에 살았고

어른이 돼서는 지하공간은 술집, 카페, 연습실과 같은

상업적인 시설로 경험을 했었다.


이후 해외로 나가서는 지하공간은 거의 경험하지 못했다.

땅덩어리 넓은 나라에서는

지하를 파서 아래위로 공간을 만들기보다는

대지위에 사방으로 널찍하게 공간을 늘리는 일이 많다.

물론 대도시는 예외다.


내가 한 때 머물던 한 도시는

인구 분산 정책이 꽤나 잘 유지된 계획도시여서

주거지, 상업지, 산업지등 대지와 공간의 구분이 명확했다.

도시의 아파트는

싱글이나 경제적 여유가 별로 없는 가족이 살았다.

대부분 가족을 꾸리면

거주지역의 단독 주택으로 이사를 간다.

넓은 저택에 물건을 채워 넣는

맥시멀리즘을 추구하는 라이프 스타일이

그 도시의 중상층이 추구하는 모습이었다.


다른 나라의 어떤 도시는 유서 깊은 지역이었는데

내가 살던 집의 건물 앞 면 Facade이

역사 유적 보존 의무가 있어서

창호를 바꾸거나 색을 바꾸는 것도

6개월이 넘는 검토와 허가를 거쳐야 했었다.

땅이 넓어 건축 허가를 쉽게 내주고

올리고 부수고 또 새로 짓고 할 법도 한데

오래된 건물은 오히려 문화유산으로 지정해서

정부 보조금을 받고 그 건물과 공간을 유지 관리하는데

더 많은 에너지를 투입한다.


어쨌거나 땅덩어리 넓은 나라에서 지하 공간을

거주 공간으로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사용하고 싶어도 정부나 도시에서 허가 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반지하는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간접 경험 했을 뿐이었다.  

         


서울 반지하는 영화 ’ 기생충‘으로 유명해졌다.

연락 없던 해외 지인들이 서울에 오면

기생충의 ’반지하‘를 경험해 보고 싶다며

SNS로 연락이 왔을 정도였다.

그들이 경험하고픈 반지하는 영화에 묘사된 그대로

곱등이가 뛰놀고 방역 가스가 밀려오고

오고 가는 사람들의 발이 보이는 그런 공간이었다.


서울 반지하는 원래 주거 공간이 아니었다.

반지하는 60-70년대 도시 방공호 역할을 수행했지만

인구가 서울로 급격하게 몰리면서

반지하에도 사람이 거주하게 되었고

이후로 새로 짓는 빌라 다세대들도

임대 수익과 공간 활용을 최적화 하기 위해

지하를 주거 공간으로 만들어 시공했다.


지금은 반지하의 불편함이 많이 알려졌고

또한 건축비가 많이 들고

시공 기간이 오래 걸리는 단점 때문에

지하공간 없는 지상층의 필로티 구조가 대세다.


그래서 반지하가 있는 건물은

연식이 꽤나 오래된 건물로 생각하면 된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도 준공 30년이 넘은 건물이다.

당시에는 이 동네에서 꽤나 사는 사람들이 살았을 법한

넓은 빨간 벽돌의 3층 연립이다.

1동과 2동 간의 동간 간격 또한 넓어서

지상 병렬 주차도 여유롭다.

그리고 옛날 스타일의 구조인지라

실제 사용 평형도 넓고 집 구조도 시원시원하다.


층간 소음은 어떨까? 살짝 걱정했는데

도무지 사람이 살고 있지 않는 것처럼

층간 소음이 없다. 이 또한 놀랍다.

건축비와 자재를 아낌없이 사용하던 시절의 집이라 그런가?

부동산 사장님이 말한 연식이 있지만 튼튼한 연립이라는 말이 어떤 뜻인지 알 것 같다.      

게다가 주인이 얼마나 야무지게 리모델링을 했는지  

앞뒤 베란다 창문이 지면과 높이가 같아

비가 오면 베란다로 물이 넘어오지나 않을까 생각했는데

얼마 전에 보니 지면에

방수벽/ 방수문이라는 것이 있다는 걸 알아챘다.


오늘 딱 비가 왔는데 베란다는 뽀송뽀송하고 집은 포근하다.

간혹 옆집이 오가는 소리가 들리기는 하지만

또한 얼마나 조용한지

그리고 집을 나서면 초등학교, 주민센터, 파출소, 편의점, 지하철역까지 모든 게 한걸음 거리에 있다.

마치 새로운 외국 도시를 한달살이 하는 것

마냥 낯설고도 익숙한 거리가 너무 맘에 들어

목적 없이 골목 구경하는 산책 시간이 점점 늘어났다.      


이곳에는 책상과 의자, 좌식소파, 싱글 매트리스가

가구의 전부다. 옷은 캐리어에 포개져 있다.

어느 곳을 봐도 살림이나 가구나 살림으로

벽이 막혀 있지 않아 답답하지 않다.

아침에 눈을 뜨면 텅 빈 공간이 주는 여유로움에

참으로 홀가분하다.


호텔이었으면 침대가 방을 한가득 차지하고

사각거리는 건조함으로 눈이 뻑뻑하겠지만

적당한 겨울의 습기와

빵빵한 보일러 덕분에 모든 것이 쾌적하다.


무엇보다 텅 빈 공간이 주는 여유로움이

내 마음까지 가볍게 만든다.

이곳에는 빈 공간이 차고 넘친다.

그 여유로움에 한껏 만취해 있다.

오늘 아침 눈을 뜨면서

이곳에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의 한가로움에 생각이 몽글몽글 피어났다.


'그러려면 5톤 컨테이너에 있는

살림의 3/2는 포기해야 해.

가장 먼저 처분해야 할 건 대형 소파와 식탁이고

거기에 양문형 냉장고도.

양문 냉장고가 이 작은 부엌에 들어가고 나면

숨이 턱 막힐 거야,

책방과 옷방을 따로 만들어야겠지.

드레스 룸이 별도로 없으니

가장 작은 방을 드레스룸으로 만들려면

이동식 행거와 선반을 만들어 짜야하고

거기에 옷과 가방과 정리하면 되고... 화장대는.... '


생각의 꼬리에 꼬리를 이어가며

머릿속으로 또 살림 정리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에 오려면 또 뭔가를 사야 한다.

집에 맞는 냉장고, 집에 맞는 에어컨, 집에 맞는 옷 수납 시스템 등등등등


'그러고 보니 여기 신발장도 없네,

그럼 신발은 어디에 보관하지?.... '    


이런 생각 끝에 알게 되었다,

내가 왜 이 반지하의 매력에 푹 빠져 있는지.

이곳에는 내가 관리하고 책임져야 할 것이 하나도 없다.

텅 빈 공간에 내가 앉아서 작업할 수 있는 책상과 의자

그리고 쉬면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좌식 소파,

그리고 허리 아픈 나를 밤새 편하게 쉬게 해 줄

매트리스가 전부다.

오직 나 하나만 건사하면 그만이다.      


이런 루틴이 어색했다. 재택 프리랜서 생활에 익숙해도

집에서 일하다 보면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을 동시에 처리하고

또한 살림을 때 빼고  광내며 관리해야 하는 일들이며

타인의 생명과 생계와 일상을 책임져야 하는

쉽고 어려운 일들이 늘 있었는데

지금 이곳에서는 24시간이

오롯이 나에게로만 집중되어 있다.


20여 년 전 서울의 고시원 크기 만한

프랑스의 시골 기숙사에서 느꼈던

낯설고도 자유로운 나날이 떠올랐다.

아는 사람 하나 없고 말 한마디 제대로 통하지 않았지만

24시간 온전히 허투루 보내지 않으려 아둥 바둥하던 때, 

그러면서도 신나게 자유로웠던 20살의 풋풋함 또는 무모함.

그 공간에 나의 소유라고 주장할 수 있었던 건

책들과  옷 몇가지, 이불과 컵 하나가 전부였는데

존재로 충만했던 20살과 소유로 가득한 지금의 나는

물건 없는 텅 빈 공간에서

24시간을 오롯이 나로 채우고 있다.


맘먹으면  종일 넥플렉스와 유튜브로 눈을 혹사하며

시간을 보낼 수도 있고

맘먹으면 웹소설 1회 뚝딱 뽑아낼 수도 있고

맘먹으면 책 챕터 하나도 스스슥 써낼 수 있는 시간과 공간.


물건이 빠지고 난 자리에 나라는 존재가 가득한 이곳이

내가 푹 빠진 매력이구나,

책임 없는 자유로움과 홀가분함

사물의 소유가 아닌

인간 존재 자체로 텅 빈 공간이 가득하다.

이렇게 계속 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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