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일상이 축복임을 깨닫는 새삼스러운 순간
그렇게 도전했던 많은 일들이 나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었는지 자기 의심이 올라온다.
벌려 놓은 일들, 많은 SNS 채널들과 USB에 쌓여 가는 극본과 소설들,
쓰다 만 에세이와 푸념으로 가득한 일기까지
하는 건 많은데 막상 뜻대로 풀리지 않는 앞날인 듯 날카로운 자기 검열이 다시 시작된다.
이런 과정이 진즉에 있었어야 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뭐든 다 할 수 있을 듯한 자기 희망이 있었다.
심경의 변화는 작년 여름에 내 곁을 떠난 반려견도 한 몫했다.
평생 함께 있을 듯 무덤덤하게 서로의 존재를 의지했는데
아이가 가고 나니 빈자리가 아직까지도 느껴진다.
생로병사의 축소판을 보여준 아이가
남은 인생 즐기며 즐기며 살라고 깜장 콧등을 내 손에 비비는 듯
시간의 한계가 너무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해서 정리하기 시작한 나의 Job多한 일상!
이토록 나 자신에게 냉정한 적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나에서 벗어나 자아와 에고, 기대와 현실, 노력과 결과, 능력과 시간을
글로 도표로 마인드 맵으로 정리했다.
무엇을 간직하고 무엇을 버려야 할지 마치 옷정리를 하듯이
마음을 솎아내기 시작했다.
허영과 허세와 욕심과 욕망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리했다.
재활용도 안 되는 음식물 쓰레기봉투에 담아 꼭꼭 묶어 버렸다.
빈틈없던 일상에 빈틈을 듬뿍 내주었다.
버려야 새로운 것이 들어올 수 있듯이 포기해야 또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다.
포기는 실패도 좌절도 아닌 존재를 가볍게 만들기 위한 덜어내기라는 걸
10년 만에 다시 깨닫는다.
그래, 한국에 다시 돌아온 지 10년 지나고
11년 차인데 변할 때도 되었지....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건 정말 옛말이다.
시대 보정이 필요한 문구다. 15분 영상도 지루해지는 마당에
1분 영상에서 30초 영상까지 우리 두뇌를 자극하는데
10년이라니....
이런 초스피드 생활 시간대에서 10년이 지나서야
뭔가 깨닫고 일상을 바꾸는 나는 한 없는 느림보 달팽이지만
그래, 변화를 주려는 이 노력이 얼마나 가상하냐!
내 영혼을 독하고 냉정한 자아비판으로 털털 털어놓고
마지막으로 칭찬 한 스푼 넣어준다.
쫄 린 마음이 편안해진다. 어때, 칭찬 한 스푼 더 넣어줄까?
독일에서 서울로 오기 전에 난 운동을 참으로 열심히 했다.
숲 속의 조깅과 알프스 등산은 물론 동네 헬스장 단골이었는데
서울에 온 이후로 운동과 담을 쌓고 있었다.
스트레칭 5분이 한 달의 운동량인 듯했는데...
지금 살고 있는 공동주택 지하 1층에 헬스장이 있다.
거기 드디어 길을 텄다. 정말 칭찬할 만하다.
러닝 머신을 하고 가벼운 무게로 근력 운동을 하고
거울 속에 나를 바라봤다.
어쩌면 처음으로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본 건지도 모르겠다.
중력을 거스르는 일로 땀범벅이 되어버린 민낯의 내가
더는 낯설지가 않다. 내 얼굴이 원래 이렇게 생겼던가?
내 몸이 이런 모습이었던가?
결과와 성과로 늘 외부로 향했던 에너지가 나의 존재로 향하게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해도 괜찮다
의도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상이 더는 불편하지 않다.
소유를 향한 욕심에 즐길 줄 몰랐던 내 존재가 반갑다.
옷을 버리고 신발을 버리고 가방을 버리고
살림을 버리고 가구를 버리고
마침내 내 욕심과 헛된 희망을 버리고 나니
이토록 가볍다.
소유물을 되찾고 또 소유물을 버리는 속에서
내 존재의 저울이 균형을 찾는다.
'이너 피스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삶의 균형은 존재도 소유도 아닌 이 두 가지의 오묘한 조합이라는 거....
심플 라이프 만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