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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VA Jun 12. 2023

쇼핑이 자기 합리화에 빠질 때

철저하게 만들어진 필요와 결핍

'이걸 언제 다.....?'

신발장 옆 수납공간에 있던 박스를 열었다.

내가 포장해서 내가 넣어 놓고도

그 안의 내용물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듯 두 손 놓고 멍하게 상자를 봤다.

이사를 오가며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문구 상자였다.

'이렇게 많았나?....'

내가 요즘 쓰는 필기구는 저렴이 만년필과

0.5 밀리 샤프와 여러 색깔이

심하나에 들어가 있는 색연필이 전부인데

상자 안에는 벼룩시장에 보따리를 펴 놓고

며칠을 장사할 수 있을 만큼의

알록달록한 색깔 필기구와 다양한 목적의 필기구가 있었다.

'내가 이걸 언제, 왜 샀지?.....'


상자 속에서 지퍼백에 분류되어 있는 필기구를 꺼냈다.

우선 연필, 샤프, 심의 굵기별 검은 볼펜, 색깔 볼펜,

색깔별 형광펜, 검은 사인펜, 만년필,

굵은 색연필, 얇은 색연필, 잉크, 잉크심,

볼펜 심, 필통 여러 개.

거기에 지우개, 풀, 가위, 칼, 스테이블러,

서류집게, 원형고리,

종류별 스카치테이프, 포스트잇... 끝이 없다.

종류를 열거하려는 게 아니라

이렇게 분류된 가짓수가 어이없어서 그런다.

다람쥐 도토리 모으듯 어쩜 이렇게 야금야금 모았을까?


샤프는 0.3 밀리부터 1.5 밀리까지 (샤프심포함) 다 해서 20자루도 넘게 있고

검정 볼펜은 세어 보니 50자루가 넘는다.

색연필과 색깔 사인펜은 브랜드 별로 거의 다 있는 듯...

한 손에 다 쥐어 지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포스트잇이 제일로 어이없다.

말풍선 모양의 포스트잇은 왜 샀을까?  

크기와 색이 뭐 이렇게 많은지,

거기에 플라스틱 재질의 반투명 포스트잇 까지 더해져서

언제 이걸 다 써먹어야 하는지 고개를 절래 절래 했다.



작업실을 구해서 '작가놀이'를 했던 때였다.

전업 작가를 선언하며 글로 먹고살겠다고 했던 때였다.

극강의 집순이인 나를 작업실로 몰아세우며

책상 하나, 의자하나, 소파하나, 커피기계

이렇게만 공간을 채웠었는데

눈에 보이지 않던 책상 서랍은 산책 코스인 양

거의 매일 들렸던 문구점에서

나의 스트레스와 맞교환한 필기구로 쌓여 갔다.

샤프와 볼펜에서 조금 비싼 색연필로

갈아탄 계기도 떠올랐다.


컬러링 북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한다며

굵기가 서로 다른 색연필과 사인펜을 차곡차곡 모아갔었다.

그걸 열심히 사용했냐고? 그렇지도 않았다.

마치 어릴 적 크레파스 48색을 선물 받은 아이처럼

흐뭇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알록달록한 색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져서

만지작 거리며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 그 고가의 사인펜 세트는

 수분이 말라서 잘 나오지도 않는다.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쉽고 빠른 방법은

자신의 뇌를 기분 좋게 해주는 것이다.

뇌를 가장 효과적이고 빠르게 기분 좋게 해주는 방법은

먹는 거다. 예민하고 짜증 날 때 단거나 매운 걸 먹으면

뇌는 단맛의 천국과 매운맛의 지옥을 오가면서

다시 일상의 균형이 정말 행복하다고 느끼게 된다.


두 번째로 자주 사용되는 스트레스 해소법은

쇼핑이다. 쇼핑이야 말로 자본주의에 최적화된

너도 좋고 나도 좋은 행동이다.

소비자와 판매자 모두 소비자의 쇼핑이라는 행동을 통해

필요를 해소하고 결핍을 메꾼다.

시간과 돈의 가치는 이 두 집단의 마케팅과 딜로 결정되는데

이 맞교환이 늘 균형 있게 일어나지는 않는다.

시간과 돈을 많이 써도 맘에 들지 않는 물건을 얻을 때도 있고

반대로 생각지도 못한 저렴한 가격으로 고가의 가치를 얻을 때도 있다.


내가 선택했던 스트레스 해소법은

최소의 시간과 비용만을 투자한

필기구와 문구류의 쇼핑 있었다.

필기구가 쌓여갈 때 약간의 양심의 가책도 있었다.

하지만 늘 적은 비용의 소비로 나를 합리화했다.

'이 정도는 괜찮잖아' 하면서 말이지.


산책을 빙자해 문구점까지 걸어가면서 운동(?)도 하고

막힌 글에 숨도 불어넣고

내가 필요하고 갖고 싶었던 필기구까지 얻는

일석 삼조의 매우 스마트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더랬다.

그렇게 작업실을 양도할 때까지 4여 년의 시간 동안

책상자만큼이나 무거울 정도의 필기구와 문구류를 모았다.

앞날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필기구와 문구류 쇼핑으로 치환하던 때였다.



그래서, 공모전에 당선은 했냐고?

책은 출판되었냐고?

제작사와 계약은 했냐고?

그저 허탈하게 웃을 뿐이다.

질문과 동시에 마음 한구석 밀어 뒀던 두려움이 올라온다.

지금 나의 모습이 고등학교 때 독서실 총무 아저씨의 모습과 겹친다.

처자를 거느렸던 권위 한가득한 아저씨는  

사법고시 준비로 늘 법전을 펼쳐두고 있더랬다.

나 역시 한국인 여성 평균 나이의 반을 넘었는데도

여전히 집과 카페를 오가며

꿈과 희망으로 자판을 두들기고 있다.

그리고 나의 불안과 두려움이

결코 필기구와 문구류 쇼핑으로 해소되지 않는다는 걸

그렇게 필기구 쇼핑을 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꼭 필요하다고 , 이건 반드시 챙겨 둬야 한다고

필요할 때 바로 쓸 수 있다고,

구매를 고민할 때마다 나는 나를 설득했다.

그러면서 내가 갖고 있던 근원적인 스트레스를 밀어냈다.

아는 유명 작가님은 한때는

홈쇼핑 상자가 문 앞을 가려

문을 열지 못한 적도 있었다고 했으며

또 다른 작가님은 초음파 안경 세척기를

살까 말까 한 달도 넘게 고민했었다고 수줍어하셨다.


누구는 지르고 누구는 망설이지만

결국 그들 역시 근원의 불안함과 스트레스를

작은 걸로 대치해서

어찌 보면 마음과 뇌를 그렇게

포장하고 속인 거였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나에게 이렇게 위로했다.

필기구 덕분에 그 힘든 4여 년의 시간을 버텼다고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얼마나 나약하고 허약했는지.

만약 잘 나가는 작가가 되었다면

이 에피소드는 마치 성공담인 양 회자되겠지만

지금 나에게는 숨기고픈 흑역사일 뿐이며

쇼핑으로 불안이 해소된다고 믿었던

어리석은 자아의 모습으로만 남겨졌다.


상자 속에서 종류별 필기구를 꺼내 필통을 채웠다.

허약한 자아와 부푼 에고가 올라올 때마다

이 필기구들을 꾹꾹 눌러써야겠다고 맘먹는다.

이 글을 읽는 이들은 그럼 공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거다.

맞다, 공책이, 노트가 필요하다.

근데 내가 그때 필기구만 샀겠냐고....

공책과 연습장과 노트도 함께 잔뜩 챙겨뒀지.. 아휴...

그런데 이거 언제 다 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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