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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VA Oct 20. 2023

우유부단의 무게

욕망과 생각에 숨이 짓눌린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에서 향기가 밀려온다.

비가 온 뒤 하늘은 구름 하나 없이 말갛고

낙엽이 쌓이기 시작한 흙바닥과 습기를 머금은 나무에서

건강한 공기가 이중창 너머로도 느껴진다.

산책 갈까?


산책하기 딱 좋은 레깅스에 삼선 양말을

종아리 중간까지 올려 신고

민망한 하체를 가려주는 바람막이 점퍼를 입었다.

식탁에 놓여있던 핸드폰을 챙기러 다시 주방으로 왔다.

마감 끝나고 읽으려 했던 책이 눈에 들어온다.


책을 펼쳤다. 책을 읽다 보니 활성화된 전두엽에서

잊고 있던 일을 상기시킨다.

노트북을 펼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을 풀어 나가다가 마음에 드는

적당한 단어가 글이 떠오르지 않아

두뇌에 산소를 공급해 주고자 뻣뻣해진 목을 돌리고

어깨를 회전시키고  자리에서 일어나 상체를 좌우로 비틀며 허리 운동까지 했다.

개수대에 놓인 우유 거품기 통과 커피잔이 눈에 꽂힌다.


설거지를 시작했다. 설거지 끝에 바닥 청소하는 습관이 있어

청소기를 가져왔다. 주방에서 시작해 마루까지 영역이 확장된다.

메케한 먼지 냄새가 청소기에서 난다.

성급히  엄지발가락으로 스탑 버튼을 눌렀다.


조용해진 실내는 TV방송 소리로 채워졌다.

이왕이면 녹이 슬기 시작한 외국어 실력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자는 마음으로

외국어 방송으로 채널을 돌렸다.

그러다 문뜩 떠오른 생각이 있어

다시 노트북에 앉아 글을 썼다.

그 글에 맞는 사진을 고르려고 픽사 베이에 들어가

사진을 찾기 시작했다.

관련 사진은 수천 개가 넘었고 분류된 페이지는 10개 이상이었다.

페이지를 클릭해서 하나씩 보다가

아까 막혔던 글에 딱 적당한 표현이 떠올라

글을 써나가다가 다시 막혔다.

파랗게 빛나던 하늘이 빨갛게 노을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나는 과연 오늘 하루 무엇을 했을까?

시작은 했지만 끝낸 일은 설거지 하나뿐이었다.

이 모든 우왕좌왕의 시작은 산책이었다.

가볍게 쓰윽 나가면 그만인 것을 다른 일들이 산책 나가려는 내 발목을 잡은 거다.

아니, 어쩌면 난 기꺼이 발목을 잡아달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집밖으로 나가는 일은 엄청난 마음 다짐이 필요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려면 대단한 에너지를 소비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마음먹은 일을 해내지 못하는 나를 어리석게 보며

어떻게든 합리화를 하려는 자기기만의 달인이 되어 버렸다.


하는 일은 많은데 되는 일은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결과가 두려워 결과를 유보 상태로 남겨 둔다.

그리고 딴짓하며 끝없이 노력하고 에너지를 쓰면서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한다.

욕망을 이루기 위한 방향과 속도를 정확히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면고는  다른 길로 간다.  

마음속 욕망을 숨기려 에둘러 일을 만든다.

그러다 보니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일은 무지 많이 하고 계속해서 사부작 거리며 삶을 헤쳐나가지만

나를 기쁘게 하는 일들이 점점 줄어든다.

하루가 기계적이고 사무적으로 돌아간다.


꼬리에 꼬리가 물려 늘어진 하루,

게으른 완벽주의자가 우유부단의 정석을 보여준 하루.

이게 오늘 하루만의 일이었을까?

 이 무겁게 늘어진 꼬리를 잘라 버릴 때가 왔다.

내면의 울분과 환경의 변화가 딱 맞물려 떨어진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목 밑까지 밀려왔다.

이렇게 살다가는 생각들의 무게에 내가 곧 수면으로 가라앉을 것 같다.

다시 세상으로 떠오르려면 버려야 산다.

서두르지 말고 하나씩 하나씩 다리에

매달린 모래주머니를 뜯어내자

옷, 가방, 신발, 가구와 같은 사물만이 아니라

욕망, 꿈, 생각과 같은 마음도 버려야 한다.

거기에 더하여 내 몸을 가볍게 만들어야 하고

나의 마음과 생각을 어지럽히는 관계를 정리하자

버려야만 수면 위로 올라온다. 버리자


p.s  산책은 그 다음날 나갔다. 칭찬을 보낸다, 집밖을 나간 집순이 나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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