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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VA Oct 22. 2023

필요하지 않아!

마지막 미련까지 봉인 완료

방에  이름 없는 왕릉처럼

완만하고 널따란 옷언덕 3개가 솟아났다.


첫 번째 언덕은 수년째 입지 않은 옷들의 언덕이다.

대체로 고가의 재질 좋은  브랜드로

기억과 의미가 솔솔 묻어 나는 옷들이다.

언젠가는 유행이 다시 돌아올 거라며 확신을 주면서

매년 하는 옷장 정리 때마다 추억 팔이로 나를 설득하며

옷장을 당당하게 차지했던 녀석들이다.

그들은 지금 방바닥에 패대기 쳐진 모습에 당황했을 것이다.

'함께 한 시간이 얼마인데 이토록 모질게 내치다니...'

원망의 눈빛과 더불어 그래도 제자리로 돌아갈 마지막 희망으로

저마다 먼지 머금은 자태를 나에게 어필한다.


두 번째 언덕은  구입한 지 1-3년 정도 되는 옷들로

내년에는 입지 않을 것 같은 판단에 던져둔 옷들이다.

대부분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충동구매한 옷들이다.

길 가다가 들어간 보세샵이나 인터넷 광고에 홀려

내 옷방으로 굴러 들어온 시즌 유행템으로

예쁘기는 한데 몇 프로 부족한 애들이다.

한마디로 재질과 바느질 미달로

더는 태가 나지 않는 패스트 패션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잘 알고 있다는 듯

바닥에 너 부러 진 채 나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다.


세 번째 언덕은 이런저런 이유로

행보를 결정하지 못한 옷들이다.

한마디로 버릴까 말까, 둘까 말까 하며

내 마음에 계속 갈등을 일으키는 옷들이다.

남주고 버리자니 아직은 필요한 것 같지만

옷장에 두고 있으면 보는 것만으로도

매칭하는데 스트레스를 주는 아이들이다.

이들은 하나하나 보면 특이하고 예쁜데 코디하기 난감하다.

개성이 너무 넘쳐서 어디 한 군데 맞춰 입기 어렵다.

우리나라의 정서에 맞지 않고

더구나 내 나이(?)에는 맞지 않는

그런 평가를 혹독하게 받는 디자인으로

내 동생은 '교포스타일'이라는 별명을 붙인 애들이다.

물 건너온 희귀성과 독특함에 유행을 타지 않아

전 날 거울 앞에서 여러 번 매칭을 해서 한번 입어 주면

기분 전환 확실하게 해주는 극약처방의 매력을 뿜는다.



세 번째 언덕의 옷들을 보면서 '필요 없다고' 계속 중얼거렸지만

그들의 예쁜 모습에 자꾸 마음이 흔들렸다.

이별하려니 아쉬운 걸까 이들과의 과거를 되새겨 봤다.

예쁜 디자인에 반해 입어는 보지만

내가 소유한 다른 옷들과 어울리지 않아

수없이 다른 옷들과 코디해 봤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솔직히 이후 옷장에 걸려 있는 것만으로도 살짝 짜증 나는 아이템이었다.

때로는 왜 샀나 싶을 정도로 나의 과거를 후회하는 마음도 있었다.

볼 때마다 내 실수가 떠올라 그 실수를 만회해 보려는 노력을

참으로 많이 했지만 결국 실패한 아이템이었다.

어머나! 이렇게  구매 실수와 돈과 시간 낭비를 인정해 버리니

정이 뚝 떨어진다.


옷들을 세 개로 구분한 의미가 없어졌다.

모두 다 내 옷장에서 내보내야 하는 녀석들이다.

나는 모두 신상품 마치 곱게 접어 기부 센터 박스에 차곡차곡 넣었다.

중고 거래 플랫폼에 판다면 어떨까?

빠르게 움직이던 내 손이 멈칫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 몇몇 아이들은 다시 내 옷장을 차지하고

내년에도 후년에도 미련과 아쉬움과 후회로

쓸데없이 나의 에너지를 빼앗을 것 같았다.


안 보면 떠오르지 않을 기억들은

중요하지도 소중하지도 않은 거다.

그리고 어차피 기억이란 시간으로

각색되고 편집되고 또한 사라지기에

좋은 기억만 남기기에도 벅찬 시간들이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박스를 투명 테이프로 돌돌 감아 버렸다.

다시 열기에는 테이프가 아까울 정도로 꽁꽁 붙였다.

끙끙 거리며 현관으로 모두 옮겼다.

그리고 문을 열어 문 앞에 차곡차곡 박스를 올렸다.

그리고 도어 슬램!


누군가에게 전달되어

좋은 의미로 예쁜 순간을 만들어 주면 좋겠네

나와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누군가에게는 좋을 그대들, 잘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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