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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VA Oct 20. 2023

헤어질 결심  

얘들아, 이제는 안녕!

나라 간 나라 사이의 이사와 한 나라 안에서의 이사를 다 꼽으면 열 손가락이 부족하다. 

짐 싸기의 달인, 정리의 달인의 경지에 이른 내가 이삿짐 견적을 하러 오는 담당자에게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살림 별로 없어요' 


담당자들은 고객이 견적을 줄이기 위해 하는 말이라는 걸 잘 안다. 

그런데도 내 살림을 보면 한결같은 의견이 나온다.

잔잔바리 살림은 거의 없지만 같은 종류의 짐은 많다는 거다. 

책, 옷, 가방, 신발... 

하긴 이거 빼면 뭐가 더 있을까 싶다. 

그런데 이것들은 내가 철 따라 유행 따라 쇼핑을 해서가 아니라

너무 잘 간직해서, 다른 말로 잘 버리지 못해서 차곡차곡 쌓인 물건들이다.

후천적인 환경으로 근검절약의 정신이 투철해서도 아니다. 

내 안의 결핍과 정서의 애착을 사물에 투영한 탓이다. 

서사 없는 인생 없듯, 스토리 없는 사물이 없다, 최소한 나에게는. 

이 옷은 언제 무엇을 하면서 왜 구입했으며 언제 입었는지부터 

돈 많이 벌어다 준 가방, 계약을 많이 성사해 준 신발처럼 

당시의 희노애락이 담긴 사물들은 버젓이 집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나의 정리 기준은 의미와 실용성이다. 

의미는 서사와 감정이 결합될 때 작동한다. 

서사만 있으면 무미건조하고 

감정만 있으면 실체 없는 뜬구름이다. 

적당한 의미는 기억될 만한 사건의 서사와 감정이 얽혀야 한다. 

이야기와 감정이 물건에 담기면 그때, 의미있는 애착 물건이 된다.


이사 하면서 정리하고 버렸던 물건들은 

의미가 사라졌거나 실용성조차 없어버린 물건들이었다.

실용성은 있지만 의미가 없다면 얼마든지 대체 가능한 물건이라는 뜻이다. 

사물의 본질만을 따진다면 대체 가능하지 않은 물건은 없다. 

가위는 잘 들면 그만이고 장바구니는 물건을 잘 담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이것들이 어떤 사건과 연결되어 의미가 부여되면 

실용성이 떨어지더라도 간직하게 된다. 

나의 문제는 이러한 의미 담긴 물건이 너무 많다는거다. 


맥시멀리스트에는 크게 두 부류가 있다.  

쇼핑행동 자체를 즐기는 부류와 나처럼 버리지 못하고 간직하는 부류다. 

쇼핑 행동을 즐기는 부류는 포커스가 현실에 맞춰져 있다. 

보관하려는 부류는 정리하고 버리고 나누는 선택이 

어렵고 귀찮아 미루는 경우 또는 

나처럼 정리는 철 따라 정리는 하지만 

지나치게 의미 부여해서 사물에 애착을 만들어 내는 경우가 있다. 


나는 정리를 제법 잘한다. 그것도 철 따라 말이다. 

올해 초 컨테이너에 이삿짐을 넣고 반지하 달방에 한 달 살이가 결정 났을 때도 

정말 많은 사물을 기부 센터에 보냈다. 기부 센터에 주차 공간이 협소해서 

며칠을 나눠서 낑낑거리면 옷과 가방과 신발을 기부했더랬다. 

책은 오래된 책을 위주로 정리하면서 중고 서점에 많이 넘겼는데 

아직도 못 버리는 책이 있다. 어학 사전이다. 그것도 20권이 넘는다. 

요즘 누가 사전 찾아 보나? 나도 네이버와 구글창을 통해 검색하는데.. 


매우 진진하게 중고서점에 넘길 생각을 했더랬다. 

중고 서점에서 현금과 교환의 대가는 박했지만 

저것들이 사라지고 남는 공간은 제법 클 거라는 계산이 들었다. 

그래, 마지막으로 한 번만 펼쳐 보자... 

1993년, 1994년, 1995년, 1996년... 날짜와 메모가 계속해서 나왔다. 

열심히 공부했던 형광펜의 흔적에서부터 

시험 요약본으로 판단되는 포스트잇도 사이사이에 있었다.

결국 헤어지지 못하고 여전히 손이 잘 닿지 않는 책장 가장 위와 아래를 차지하고 있다. 

나는 무슨 미련으로 왜! 저들을 버리지 못하는 걸까?  


추석에 부모님 댁에 갔을 때 언제나 나오는 이야깃거리,

아빠의 뒷방 작업실 이야기였다. 거기는 오만가지 사물이 다 있다. 

일종의 샘플실이자 박물관이다. 아빠가 제작했던 물건이 한 두 개씩 다 있으니까. 

아빠는 그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특별하게 하는 일은 없지만 

그 공간이 주는 나름의 감정이 분명 있는 듯하다. 

엄마가 그곳을 정리하자고 했지만 아빠는 언제나 반대한다. 

엄마는 그곳을 좀 더 깨끗하고 말끔하고 세련되게 정리하고 싶어 하지만 

아빠는 손도 대지 못하게 한다. 엄마는 그곳을 아빠의 젊은 시간이라 말했다. 

아빠는 그 공간이 사라지면 아빠의 젊은 시절의 기억도 사라진다고 믿는 듯하다. 

내가 사전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렇다면 옷부터..  그래, 옷방 문을 연다!

누구부터 처단할까? 

내 눈길이 닫는 녀석들 마다 벌벌 떠는 것 같다. 

나와 눈이 마주치는 녀석이 하소연을 늘어놓는다. 

'저, 저... 잘 아시잖아요, 제 피렌체에 갔을 때 너무 맘에 든다고 

없는 돈에 점심값까지 아껴가며 저를 들이셨잖아요.....' 

20년 넘은 허리 잘록한 검은 가죽 잠바의 항변이다. 들어줄까 말까? 

중년의 끝으로 향하는 나이, 뱃살 가리기도 급급한데 

허리 잘록한 저 옷 앞섶이나 잠겨질까? 

'Nop, OUT!'


의미를 배제하고 철저하게 사물로만 대하기로 하니 

실용성으로 판단하기가 쉬워진다. 

내가 버리고 비워야 할 건 사물이 아닌 의미와 애착이었다. 

버리는 일도 노력해야 한다. 

사물에 담긴 의미를 수거해서 사물만 버리는 노력. 

실용성과 유행 하나만으로 , 다시 말해 사물을 사물로만 보는 

냉정한 바라봄의 노력이 필요하다. 

우유 부단은 이제 안녕! 

과감하다 못해 과격한 버리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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