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그림자
카프카의 영혼에 드리워진 어둠, 아버지
카프카 작품에는 그의 아버지로 여겨지는 인물이 여러 상황에 다양한 인물로 변주되어 나타난다. 그의 아버지는 그의 바람대로 아들 덕분에 유명해진 셈이다. 헤르만 카프카는 프라하에서 남쪽에서 멀리 떨어진 아주 작은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헤르만 카프카의 아버지, 즉 카프카의 친할아버지는 정육점을 운영했다고 한다. 당시의 정육점 운영은 도축에서부터 배달까지 매우 고된 일이었다고 한다. 강인한 체력이 필요했기에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당시 동유럽 유대인은 보부상 또는 보따리장수처럼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며 장사하는 행랑객이 대부분이었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매우 고단한 삶이었다. 이들에 비하면 카프카의 친할아버지는 제법 안정적인 벌이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카프카의 할아버지는 모두 육 남매를 두었고 이 남매들은 한겨울에도 아버지를 도와 고기를 다듬거나 배달하는 일을 해야 했다. 매우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이 육 남매들은 성장하여 프라하에 중상층으로 자리를 잡았다. 모두가 부지런하고 성실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유대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한몫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유대인은 중세 이후의 유럽 각 지역에서 유대인을 강제 격리하기 위해 설정한 게토(ghetto)에 살아야 했다. 중세시대에 유럽 전역을 거쳐 흑사병이 퍼졌을 때 유대인이 기독교인을 죽이려 악마와 결탁하여 퍼트린 질병이라는 황당한 소문이 있었다. 인류의 흑역사였던 중세는 이것을 진실이라 여겨 유대인을 격리했다. 이것이 바로 게토(ghetto)의 시작입니다. 시대가 바뀌어 유대인에 대한 차별을 완화하며 시민권을 부여하면서 거주의 자유가 부여된다. 유대인의 신분 상승에 대한 욕망은 터질 듯했다.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군인으로 자원하거나 대학교에 들어가거나 산업혁명의 기회를 이용해 큰 자본가가 되거나 해서 유럽 사회로 동화하고자 했으며, 이러한 흐름에 헤르만 카프카도 동참했다.
10대를 맞은 카프카의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는 자신의 고향을 떠나 경제적 자립을 시작했습니다. 요즘 말하는 보따리장수로 성공했고 체코 시민으로서 군대에 복역한 후에 프라하로 이주했습니다. 헤르만 카프카는 사업수완이 매우 좋았다고 알려졌다. 열네 살에 부모로부터 자립하여 객지에서 혼자 살아남으며 장사를 했던 경험에 매우 자신만만하고 추진력이 좋았다고 한다.
헤르만 카프카는 키도 크고 체격도 우람하여 이러한 건장한 체력이 또한 성공의 밑받침이 되었다. 반대로 카프카는 왜소하고 마른 허약했다. 카프카는 내성적인 성격과는 별개로 자신의 몸을 건장하게 만들고 싶어 했다. 어린 시절 카프카가 하루는 아버지와 함께 수영장에 갔는데, 아버지의 떡 벌어진 체구와 큰 키에 기가 죽어 아버지 앞에서 맨 몸을 드러내기 거북했다고 회상했다. 어린 카프카에게는 아버지의 우람한 모습은 믿음직하고 의지할 수 있는 안정감을 주기보다는 카프카의 안으로 파고드는 열등감과 두려움이 자라났다.
독단적인 아버지와 유약한 어머니
헤르만 카프카는 서른 살이 되어 독일계 유대인 율리에와 결혼했다. 유복한 집안 출신이었던 율리에가 가져온 결혼 지참금으로 액세서리 상점을 시작했다. 상점은 번창했고 헤르만은 승승장구 모든 것이 두려울 게 없을 정도였다. 경제적으로 성공을 거두면서 원래 독선적인 성격이 더욱 강해졌다. 아이들에게 자신의 신분 상승과 경제적 성공에 자신감 넘치게 설명하며 그대로 아이들이 따라 하라고 강압적으로 요구했다.
카프카 밑으로 태어난 남동생 두 명은 어렸을 때 일찍 세상을 떠났기에 카프카는 외아들이나 마차가지였다. 카프카가 6살 때 여동생이 태어나고 그 이후로도 2명이 더 생기기는 했지만 헤르만 카프카는 프란츠 카프카가 가업을 이어받아 자신처럼 떵떵거리는 돈 많고 당당한 사업가가 되기를 바랐다. 헤르만 카프카는 무일푼에서 자수성가한 사람들의 보편적인 특징을 모두 보여주었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 높고 성공을 향한 집념이 강하고, 목표 지향적으로 앞만 보고 갔다. 옆에 누군가가 자신에게 질문하고 대화를 하고 사랑을 원하는지 볼 수 없었다. 카프카의 아버지는 카프카가 유대인이라는 전통을 고수하기보다는 재력을 쌓아 신분 상승하는 세속적인 삶이 좋다고 강조했다. 자신의 아들의 성격과 성향이 어떤지는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을뿐더러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의 모습을 아들이 무조건 따라와 주기를 바랐다.
옛날부터 아버지는 아버지의 노력 덕분에 제가 없는 거 없이 편안하고 따듯하게 풍족한 삶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질책의 말로 삼았습니다. 그리고는 이런 말들을 이어가셨습니다. 저는 이런 말을 하도 들어서 분명 제 머리에는 여러 줄의 고랑이 새겨져 있을 겁니다.
"일곱 살 때부터 나는 벌써 손수레를 끌고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녀야 했다."
"우리는 모두가 한 방에서 잠을 자야 했지"
"우린 감자만 있으면 남부러울 것 없이 행복했다."
"겨울에 입을 옷이 부족해서 여러 해 동안 다리 여기저기가 갈라 터졌었지.”
"꼬맹이였을 때 나는 이니 저 멀리 피섹으로 장사하러 다녀야 했다."
"집에선 한 푼도 받은 게 없었고, 군대에 가서도 마찬가지였지. 오히려 집으로 돈을 부쳤어."
프란츠 카프카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카프카는 이러한 아버지 밑에서 숨쉬기조차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예민하고 감수성이 많았던 카프카는 아버지의 기대와 희망을 채우려 노력했지만 진심으로 자신이 원하는 삶의 모습이 아니었기에, 아버지를 향한 양가감정으로 괴로워했다. 아버지가 원하는 모습이 되지 못한 죄책감과 자신을 이해해 주지 않는 원망의 감정. 카프카는 죽기 전까도 아버지와 자기 자신과 화해하지 못했다.
카프카는 아버지의 독선적이고 독단적인 언행에 말대꾸조차 못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강요에 반항하고 거부하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자괴감만 깊어져 갔다. 결국 부자 관계는 일방통행의 명령과 복종만이 남게 되었다. 자유롭게 대화하고 자신의 존재를 표현하고 의사를 나타내는 평화로운 환경이 아니었다.
카프카의 아버지는 카프카의 문학감성을 이해하기는커녕 오히려 정서적으로 세심한 카프카를 무시하고 그가 쓴 작품을 단 한 번도 읽어보지 않았다. 카프카에게는 문학은 곧 자신의 존재였는데, 헤르만 카프카가 아들의 작품을 무시함으로써 카프카의 존재까지도 무의미하게 취급한 셈이 된다. 헤르만은 문학은 돈이 되지 않는다며 카프카가 자신의 상점과 공장을 대를 이어 운영하기 바랐다. 지 않는다며 아들이 자신이 운영하는 상점과 공장을 대를 이어 운영하기 바랐다.
어떤 카프카 연구자들은 이러한 카프카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를 언급하기도 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한 이 용어를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학술적으로 개념을 정립했다. 아들이 어머니를 독차지하고 싶어 하지만 집안에서 가장 강자인 아버지가 어머니의 상대임을 알고 무의식적으로 아버지를 증오하다가 결국에는 아버지를 닮아 간다는 것이 주 내용이다. 이 심리학적 개념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지칭하다 지금은 강자와 약자에 대한 개념으로도 확대 적용되기도 하는데 카프카와 그의 어머니 율리에와 그가 만난 여성들의 모습에서 병약스러울 정도의 애착과 애증, 심지어 집착 증세까지 찾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