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바뀌는 전환점을 이루는 몇 가지 사건이 있다. 첫 번째 사건은 독일의 신학자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두 번째 사건은 이와 맞물린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다. 이 두 가지 사건으로 하늘을 찌를 듯한 중세 교회의 지배 세력은 땅으로 고꾸라진다. 무엇보다도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의 발명은 마치 도미노처럼 파급 효과가 퍼지며 유럽 전역이 라틴어 대신 모국어를 사용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어려운 라틴어 성경을 벗어나 자국어로 번역된 성경이 인쇄술과 만나 유럽 각국에 퍼졌다. 사제 중심으로 폐쇄적이었던 기독교는 자국어 성경이 보급되자, 종교적 회의주의가 퍼졌다. 직접 읽어 본 성경과 사제들이 그때까지 설파했던 내용이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자의적인 성경해석, 정치와 경제 거기에 권력까지 지배하려 종교를 앞세웠던 중세 교회의 붕괴는 당연했다.
이제는 사제나 성직자를 통해서만 신과 통하는 시대가 아니라, 믿기만 하면 개인이 신과 직접 소통하는 시대가 도래한다. 성직자만을 통해서 신과 통할 수 있었던 시대가 지나가고 개인과 신이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바야흐로 인간 중심의 르네상스 시작이었다. 중세시대에는 인간이 하고 싶어도 교회와 종교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않았다. 교회의 이름으로 인간의 욕망과 행복이 통제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통제가 사라지자 억눌린 개인의 욕망이 분출되기 시작했다.
중세 가치관이 붕괴하면서 유대인에 대한 증오도 조금 수그러들었다, 유럽의 많은 나라가 당시의 경제체제에 맞는 중상 중의 정책을 채택했다. 금과 은과 같은 귀금속을 축적하여 나라를 부자로 만드는 것을 적극 권장했다, 이는 생산 자본주의에 앞서 나타난 경제 체제로 노동이 투입된 생산으로 이윤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유통의 과정에서 이윤이 나오는 것을 최고라 여겼다. 무역의 기본은 외국어, 자본, 빠른 계산 능력이다. 이를 다 갖춘 이들이 바로 유대인이었다. 이러한 흐름으로 유대인에 대한 집단적 따돌림이 조금 수그러들었습니다. 유대인은 현금 유동성이 좋았기에 유대인이 모이는 곳에는 자본과 기회가 넘쳐났다
인간 중심사고방식이란 무엇인가? 신이 내린 계명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 인간의 판단과 생각을 따른다는 뜻이다. 중세 시대에는 생각하는 것이 죄악이기도 했다. 하지만 인류는 르네상스 시대를 거쳐 계몽주의 시대로 들어갔다. 계몽주의는 모든 것을 인간의 이성과 합리를 우선으로 가치판다한다. 인간의 눈과 머리로 이해되고 해석되는 것이 우선이었다. 이 시대에는 유대인에게 종교적 관용이 적용되었고, 중상주의에 도움이 되는 경제 활동을 권장했지만, 정치적 참여와 활동은 금지였다. 유대인들이 유럽 세계로 온전히 들어가기 위해 기독교인으로 세례를 받아 개종해야 했다. 그래서 기독교 세례 증명서를 유럽행 입장권이라고도 했다. 관대해진 사회 분위기 덕분에 자본을 지닌 유대인들의 삶의 폭은 넓어지고 사회적 지위도 상승되었다.
결정적으로 유대인들에게 인간다운 인권이 주어진 계기는 프랑스혁명이다. 프랑스 인권 선언문은 인간의 권리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사회를 변혁시켰다. 프랑스혁명 이후 유대인은 시민권과 병역의 의무를 부여받습니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은 독일에서 두드러졌다.
독일인과 유대인
이전 글에서 언급했듯이 독일은 주변 국가 보다 산업혁명에 늦었다. 독일은 가내 수공업에서 발달한 산업혁명이 아니라, 중화학 공업 주도로 국가 산업을 일으키고자 했다. 여기에는 막대한 자본이 필요했다. 독일은 유대인을 적극 수용하기로 했다. 독일은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 유대인을 위해 사회적 기반을 마련하는데 매우 개방적이었다. 이는 타 국가에 비해 늦게 시작한 산업혁명을 성공하려는 경쟁의식과 더불어 독일 특유의 매우 냉정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적인 정서 또한 작용했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이 기회를 잘 활용했다. 당시의 독일이었던 프로이센은 1812년 유대인 법을 만든다. 이는 유대인이 그때껏 받았던 차별을 제거한 법으로 이 법안으로 19세기 이후 다수의 유대인이 독일에 동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전에는 유대인이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까지는 그들에게 유럽 시민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법적으로 불이익을 당해도 호소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하지만 이 법으로 유대인의 거주 제한이 완화되고 시민의 권리와 의무가 주어졌다. 무엇보다도 유대인에게 공교육의 기회가 주어진다. 그때까지만 해도 유대인은 가정과 유대인 모임에서 받는 종교교육이 전부였다. 공교육을 받거나 관직에 오르는 것은 상상도 불가능한 것이었다. 배움에 목말라했던 유대인들이 독일학교와 독일의 대학교에 넘쳐나기 시작했다. 유대인의 상급학교 진학률은 독일인보다 8배나 많았다고 한다. 어느 정치가는 독일은 이민족을 포용할 수 있는 세계적 시민상의 표본이라고 독려하기까지 했다. 독일의 이런 변화를 타고 카프카의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도 자신의 아들을 독일학교에 보냈다.
프랑스혁명의 기운은 나폴레옹으로 꺾인다. 나폴레옹이 오늘날의 독일 남부 지방을 점령했다. 이후 독일 전역에 반 프랑스주의가 일어나고 이는 다시 독일 애국주의 운동이 퍼진다. 독일은 반 프랑스주의를 겉으로 내세우면서 프랑스의 계몽주의에 편승한 유대인들에 대한 분노를 드러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유대인들에 대한 질투와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일자리를 잃은 수공업자들이 특히나 적극적으로 유대인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다.
독일계 유대인은 그때까지만 해도 스스로를 독일인이라고 생각했다.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을 때는 독일군으로 참전도 했다. 유럽계 유대인들은 역사적으로 많은 수난을 겪었고 살아남기 위해 신앙을 포기하고 유럽의 기독교 문화에 동화하여 공생하면서 유럽 문화에 대단한 공헌을 했다. 특히 독일계 유대인은 유럽의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여러 학문 분야는 물론 연극, 작곡, 음악가, 출판, 작가 지적 생산력이 높았던 이들은 거의 모든 학문과 예술분야에 선구적인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