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적 피난처, 밀레나 예젠스카
카프카는 1917년 폐렴에 걸리면서 병원과 요양원을 오고 간다. 글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지만 건강이 악화되면서 창작 생활을 많이 하지 못했다. 하지만 카프카가 밀레나 예젠스카를 만나면서 다시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카프카와 밀레나는 작가와 번역가로 만났다. 밀레나는 유부녀였다. 그것도 친구 부인... 게다가 카프카보다 열세 살이나 어렸다.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더 해야 할지... 사랑 그 자체는 죄가 없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책임과 의무가 있다. 사랑의 감정만을 따라 행동할 수 있는 관계가 대부분이지만, 카프카가 선택하고 싶었던 상대는 그럴 수 없었다.
밀레나는 체코의 유명 명문가 출신이다. 유복한 성장 환경과 배경에도 불구하고 집과 아버지의 그늘에서 탈출하고 싶어 했다. 그때 여성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별로 없었다. 수녀원에 가거나 결혼을 하는 것이었다. 밀레나는 반항적으로 아버지가 반대하는 결혼을 감행했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화려한 사교계에서 소문난 바람둥이를 꼭 집어 결혼했다. 그리고 친정을 떠나 비엔나로 이주했다.
밀레나는 결혼으로 얻은 아버지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새로운 환경에 대한 설렘으로 결혼 초반에는 생활의 어려움이나 생계의 고단함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거기에 바람둥이 남편은 가정을 책임지거나 자신을 지켜주거나 최소한 정서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그런 울타리 역할도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언어의 장벽이었다. 가정을 돌보지 않는 남편 없이 홀로 지내는 시간이 많았기에 밀레나는 독일어를 배워야만 했다. 남편의 신분과 경제력에만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언어 능력을 키우고 발휘하여 신문기자와 번역가로 직업을 얻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카프카의 단편 소설 몇 편을 체코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맡으면서 카프카를 알게 된다.
밀레나는 전통적인 여성상과 거리가 멀었다. 자신의 주어진 삶의 테두리를 벗어나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려는 의지가 강한 여성이었다. 당대의 일반적인 여성과는 달리 의학과 음악을 전공했고, 부모가 정해준 남자로 정략결혼을 하는 대신, 바랑둥이였지만 낭만적 야반도주로 스스로 삶을 선택했다.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이끌려 노력했던 현대적 여성이었다.
카프카는 1920년 4월 전후로 밀레나와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카프카는 오스트리아 메란에서 치료를 받으며 밀레나와 결혼까지 꿈꾸었다. 카프카는 밀레나의 주변 인물들과 여자 친구들을 만나 밀레나의 마음을 간접적으로 확인하기도 했고, 카프카 스스로 이혼 변호사를 만나 상담까지 했다. 밀레나의 남편은 이혼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카프카는 밀레나와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런데도 카프카는 계속해서 밀레나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밀레나는 카프카에게 삶의 희망을 심어 주고 삶의 불꽃이 꺼지지 않게 생기를 불어넣어줬다. 카프카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에게 남겨진 원초적인 결핍이 밀레나로 채워질 거라 믿었다. 밀레나에게 자신을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다. 카프카는 죽기 일기장을 밀레나에게 전달했다. 이 일기장은 카프카의 친구인 브로트도 본 적이 없던 글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실종자』와 『성』과 『아버님께 드리는 편지』의 원고도 밀레에게 남겼다.
카프카는 밀레나에게 편지로 존재의 모든 고민과 삶의 두려움을 풀어냈다. 또한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안정된 삶에 대한 소망도 조심스레 드러냈다. 밀레나는 카프카에게 정신의 안식처였다. 밀레나에게 보내는 편지는 마치 대답 없는 독백의 고해성사 같다. 칸막이 너머 사제가 들어준다는 믿음으로 숨김없이 모든 것을 털어놓는 자세로 카프카는 억압된 모든 감정을 털어놓았다. 밀레나는 그에게 구원이자 성모 마리아였을지도 모르겠다. 밀레나를 향한 카프카의 마음은 애착을 넘어 집착, 그리고 강박적인 감정 파고들기였다. 솔직하다 못해 선을 넘어 버린 듯한 자기 고백은 밀레나에게 보낸 편지에 아주 잘 드러나 있다. 연애편지를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에 취해 한숨에 써 버린 작품이었다. 카프카는 밀레나에게 이렇게 편지를 쓰고 나면 존재적인 죄책감과 불안 같은 찌꺼기가 다 빠져나간 듯 순간 가벼워졌지만, 다시 쌓이는 감정을 스스로 정화하지 못해 반복적으로 편지를 쓰면서 우울과 고뇌의 생각 고리를 끊어내지 못했다. 또한 현실적인 장벽은 결코 극복하지 못했다. 밀레나는 엄연한 다른 남자의 법적 부인이었다. 그 남자가 바람둥이건 아니건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밀레나와 결혼을 하려면 밀레나는 이혼을 해야 했지만, 그건 밀레나와 카프카의 문제가 아닌 또 다른 제삼자의 선택과 결단이 있어야 가능했다.
카프카는 밀레나를 잊기 위해 현실적인 문제를 수면 위로 올리기 시작했다. 미혼남과 유부녀의 사랑을 출신의 문제라고 선을 그었다. 마치 종교 문화의 차이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처럼 핑계를 찾았다. 이질적인 문화 때문이라고 변명하고 이별을 합리화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유부녀라는 사실, 그 여자가 껍데기라도 결혼 생활을 유지하려는 마음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밀레나의 마음을 얻어 낼 수 없었던 슬픔을 이런 식으로 자기 합리화를 하며 깊은 슬픔을 위로했다.
밀레나는 자신의 삶을 개척한 당당한 여성이었지만 타국에서 홀로 나와 살면서 이혼을 감행하기에는 많은 난관이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남편이 천하의 바람둥이이라고 해도, 결혼제도에 안착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삶을 꾸려 나가고자 했다. 밀레나는 진심으로 카프카를 사랑했지만, 사랑과 현실의 괴리를 극복하려 하지 않았다. 카프카는 이별 후에도 몇 번 밀레나와 다시 만나려 시도했지만, 밀레나는 거절했다. 밀레나 역시 이별을 힘들어하고 아쉬워했지만 밀레나가 현실적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도 없었다.
밀레나는 훗날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삶을 마감한다. 불행 중 다행으로 카프카가 밀레나에게 보낸 편지가 다수 발견되면서 <밀레나에게 보내는 편지>란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편지 쓰기란 유령, 즉 자신이 애타게 기다리는 어떤 대상 앞에서 자신을 발가벗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글로 쓴 입맞춤은 상대에게 도달하지 않아요. 오히려 유령이 중간에서 차지하고 말지요. 이런 풍부한 자양분을 섭취하면서 유령은 엄청난 숫자로 늘어납니다. 이를 알고 맞서 투쟁하려고, 서로 간의 유령적 요소를 애써 제거하고 실제의 대화, 영혼의 안락을 얻으려고 인간은 철도와 자동차, 비행기를 발명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이젠 더 이상 소용이 없습니다. 이건 확실히 파멸의 순간이 다가올 때 만들어지는 발명품이지요. 유령은 더 조용히, 더 강하게 나옵니다. 편지 다음에는 전보와 전화, 뢴트겐 사진이 발명되었습니다. 유령은 굶주리지 않으며, 다만 인간만 사라질 뿐이지요.”
... 하여튼 본론을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로린과 스타샤를 비롯하여 내가 모르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당신 주위의 광범위한 사람들이 더러는 고상하게 잘난 체하며, 더러는 짐승처럼 (그러나 정작 짐승은 실제로는 그러지 않죠) 어리석게, 또 더러는 악마처럼 선심을 쓰는 체하며, 사람을 죽이는 애정으로 당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무슨 말을 하든- 나는, 나는, 밀레나, 당신의 행위가 옳다는 것을 최후의 모든 점까지 알고 있습니다. 설사 당신이 무슨 짓을 하든, 당신이 빈에 머물러 있든, 프라하로 오든, 혹은 프라하와 빈 사이에서 부유하든, 혹은 이런 일을 하든, 혹은 저런 일을 하든 말입니다. 이것을 내가 알지 못한다면, 도대체 당신과 내가 무슨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은 이제껏 나를 기만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편지는 항상 나를 기만했습니다. 그것도 타인의 편지가 아닌 나 자신의 편지가 말입니다. 그것은 나의 경우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특수한 불행이지만, 동시에 이 세상의 일반적인 불행이기도 합니다. 손쉽게 편지를 쓸 수 있는 가능성은 틀림없이 - 다만 이론적으로 볼 때- 영혼의 섬뜩한 혼란을 세상에 가져온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것은 유령과의 교신인데, 그것도 편지 수신자로서의 유령과의 교신일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유령과의 교신이기도 합니다. 후자의 유령은 편지를 쓰는 사람의 손에 의해 편지 속에서 성장하고 혹은 다시 어떤 편지가 다른 편지의 증거가 되어 이 편지를 증인으로 내세울 때에는 일련의 편지 속에서도 성장합니다. 인간들은 어떻게 서로 편지로 교신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 것일까요! 멀리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 있고 가까이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붙잡을 수 있지만,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은 인간의 힘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러나 편지를 쓴다는 것은 탐욕스럽게 편지를 기다리고 있는 유령 앞에서 발가벗는 것을 의미합니다. 편지에 쓰인 키스는 보내질 장소에 도착하지 못하고 유령이 도중에 홀딱 마셔 버립니다.
『밀레나에게 보내는 편지』 프란츠 카프카
이미 결혼을 했던 밀레나가 자신과 카프카의 관계에 대해 카프카의 친구 막스 브로트에게 쓴 편지를 보면 밀레나 역시도 카프카를 많이 아끼고 카프카의 내면을 깊게 이해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프란츠는 살 수 없습니다. 프란츠는 살아갈 능력이 없습니다. 프란츠는 결코 건강이 좋아지지 않을 것입니다. 프란츠는 곧 죽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겉으로 보기에는 살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망상과 맹목성, 열광, 낙관주의, 이런저런 확신, 염세주의 등에 기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술취할 능력이 없듯이 거짓말을 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에게는 최소한의 피난처나 안식처도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보호를 받는 곳에서 그가 무방비 상태인 이유입니다. 그는 마치 정장을 한 사람들 속에 벌거벗고 서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가 말하는 것이나 그가 존재하는 것, 그가 살아가는 것조차 진실이 아닙니다. 이는 이미 결정되어 독자적으로 되어버린 존재 방식입니다. 여기에는 삶을 질적으로 향상하는데 에 도움을 줄만한 것들, 예컨대 아름다운이나 불행 등이 제거되어 있습니다.
그의 금욕주의에는 영웅주의가 전혀 없습니다. 그를 더 위대하고 고상하게 만들어줄 영웅주의 말입니다. 모든 '영웅주의'는 착각이자 비열한 것입니다. 그는 목표점에 오르기 위한 수단으로 금욕주의를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지나친 명민함과 순결함, 타협을 하지 못하는 무능력 때문에 금욕주의에 구속된 사람입니다. “
『밀레나 예젠스카가 카프카의 친구인 막스 브로트에게 보내는 서한 중에서』
서로 영혼의 친구라고는 했지만 현실적으로 이들의 사랑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다. 카프카는 당시의 불치병과 다름없는 결핵에 걸려 있었고 밀레나는 결혼을 한 유부녀였다. 밀레나가 카프카의 작품을 번역을 했듯이 카프카의 작품을 깊이 이해하고 카프카의 문학관에 대한 통찰력이 있었지만 카프카는 밀레나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정신적으로 안정되지 않았습니다. 밀레나가 이혼을 하고 카프카와 재혼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카프카의 병적인 불안은 안정되었을까?
카프카는 병으로 결국 생을 일찍 마감하고 밀레나는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아무도 알지 못한 채 잊힌 존재였지만, 카프카가 밀레나에게 보낸 편지가 세상에 나오면서 밀레나는 누군가의 아내가 아닌 카프카의 솔 메이트로 세상에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