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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d Nov 07. 2022

섹시한 엉덩이

feat. by 페라리

강화도를 좋아한다. 강화도에 가려면 두 개의 길을 꼭 지나쳐야 한다. 강화대교를 건너는 길과 초지대교를 건너는 길. 섬이라는 것이 그렇다. 다른 길은 없다. 청명한 날씨를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어서 토요일 오전에 강화도로 나선다. 나는 초지대교를 건널 셈이었다. 초지대교로 향하는 길은 1차선 좁은 해안도로다. 


평소에는 차들이 많지 않아서 '휙' 하고 달려서 '쌩' 하게 돌아올 수 있다. 그러나 이 좋은 날씨를 나만 느꼈을 리 있나. 사람들이 몰려든다. 해안도로는 통일이 된다면 정말 아름다운 관광지가 될 것임에 틀림없지만, 슬프게도 철조망으로 막혀있고 가려져 있다. 이 볼 것 없는 도로에 사람들이 차기 시작한다. 아, 정확히는 차들이 가득 차기 시작한다. 난데없이 내 앞에 너무나 아름다운 새빨간색의 페라리가 앞선다. 페라리는 그것이 입은 새빨간 원피스 드레스처럼 짙은 향수를 내뿜는다.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는 날씨가 좋은 봄과 가을에 야외 공연을 한다. 나도 몇 번을 가본 적이 있는데 그중 한 날은 비가 많이 와서 야외 공연장에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제대로 공연을 보지 못했었다. 그런데 내 자리 바로 오른쪽 뒤편에 정말 아름다운 금발 아가씨가 멋진 몸매를 감춤없이 드러내는 아름다운 빨간색 원피스 드레스를 입고 앉아 있었다. 나의 눈은 무대가 있는 곳인 정면을 보고 있었음에 틀림없지만 아름다운 그 모습을 어떻게 그렇게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강화로 가는 시간이 길어졌던 것 같다. 평소의 두배쯤. 그러나 나는, 바로 내 눈앞에서 대놓고 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섹시한 엉덩이를 너무도 자세히 쳐다보느라 시간이 그렇게 길어졌는지도 몰랐다. 아름다운 여인의 짙은 향수가 느껴지고 몸매가 드러나는 빨간 드레스가 연상이 되면서 나는 아득한 정신으로 운전을 한 것이 틀림없다.


 기억이 자세히 나지는 않지만 나도 어릴 적 예쁜 여학생의 꽁무니를 따라갔던 적이 있었을 거라고 초지대교 입구에 들어서면서 생각해본다. 아니면 옛날 옛적 어느 밤 아름다운 여인으로 재주넘어 변신한 여우를 따라 고갯길을 넘던 정신머리 없는 그 나그네가 전생의 나였을지도 모르겠다. 


페라리는 좌회전 깜빡이를 켰고 나는 집 앞에 다다른 예쁜 여학생이 마중 나온 아빠를 만났을 때처럼 오른쪽 깜빡이를 켠다. 11월이 가기 전에 '서산집'에서 꽃게탕을 꼭 먹고야 말겠다는 마음보다는 오늘 나를 홀려버린 여우는 더 이상 쫓아가지 않겠다는 자존심이었을까. 왼쪽으로 꺾어버린 페라리를 마치 오래 전 헤어진 연인에게 다짐했던 것 처럼 다시는 눈길 주지 않겠다 마음먹고 나는 다른 섬을 찾아간다.


오른쪽으로 돌아서고서는 고속도로 찾아서 들어선 뒤 이젠 남쪽으로 신나게 달려 영종도로 향하지만 그러면서도 헤어진 연인마냥 페라리를 생각한다. 사랑은 사랑으로 잊는다 했던가. 마음을 빼앗을 다른 여우를 기대하고 있다. 


계획에는 없었지만 그동안 궁금했던 신시모도를 가보기로 한다. 신도, 시도, 모도 이 세 작은 섬이 연륙교로 연결이 되어 있는데 그곳에 가려면 영종도라는 섬에서 또 배를 타야 한다. 섬에서 배를 타고 섬에 가는데 그 옆 섬은 다리를 건너가는 것이다. 뭔가 전설의 배경인 것만 같다. 차를 태운 배를 타고 신도항에 내린다. 신도를 시작으로 세 섬을 차례로 이곳저곳 누빈다. 


정신이 없다. 홀린걸까. 어쩌면 빨간 페라리의 섹시한 엉덩이는 오늘의 내가 전설 속 여우가 걸어놓은 묘술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나그네 신세라는 것을 미리 알려주려 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곳곳에서 페라리 못지않은 여우들이 나를 노린다. 시도의 수기해변에서는 보석 같은 바다에, 모도에서는 조각품들에게 내 간을, 아니 내 시간을 뺏긴다. 


아, 괜찮다. 오늘 같은 날은 뭐래도 상관없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들이 내 간을 파 먹어도 괜찮다. 벌써 페라리의 육감적인 아름다움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빨간색은 아무리 찾아봐야 입술뿐인 시골 여인들 신도, 시도, 모도에게 홀라당 다 빼앗긴 정신머리없는 나그네의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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