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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mma Jeon May 07. 2020

나무젓가락이 뭐 어때서?

나를 지키며 사랑하는 방법


남자 친구 H와 썸을 탈 때의 일이다. 첫 데이트로 타이베이 북부에 있는 양명산으로 등산을 갔다. 즐겁게 등산을 하고 내려와서 H는 자기가 알고 있는 맛집이 있다며, 문화대학교 앞에 있는 식당에 나를 데려갔다. 요리가 나오자, H는 가방에서 개인 쇠 젓가락을 꺼냈다. 그리고 두 세트가 있다며 나에게도 쇠젓가락의 사용을 권했다. 나는 밥 먹은 후에 젓가락을 다시 씻기도 번거롭고 해서 식당에 구비된 일회용 젓가락을 쓴다며 거절했다.


환경보호, 중국어로 環保(환바오)로 줄여 쓴다. 대만 젊은이들 사이에는 이 환바오 정신이 꽤 있어서, 개인 젓가락이나 텀블러를 가지고 다니는 비율이 꽤 높다.  비닐 대신에 음료수를 가지고 다닐 수 있는 대만 전용 텀블러 끈도 이 환바오 정신에서 나왔다. 그래 ‘환바오’도 좋지만, 첫 데이트에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이 녀석이 자기 개성이 쫌 쎄구나 라고 인지하고 넘어갔다.


등산을 갔다 와서 우리는 매일 라인(Line) 채팅을 하게 되었다. 점심시간에 밥 먹었다고 챗하고, 잠자기 전에 오늘 뭐했냐고 묻는 꽁냥 꽁냥을 하게 되었다. 이 날도 아무 생각 없이 점심을 찍어 그에게 보냈고, 그의 답장은..



"재사용이 가능한 젓가락을 사용해보렴~"이었다. 나는 상당히 빡이쳐서 답장을 안 했다.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일이다. 악의 없이 보낸 문자이기에 그냥 넘어갈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이것이 연인 관계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리트머스 테스트로 보였다. 환경보호는 네가 하는 것인데, 그것이 아무리 옳고 좋은 일이라도 나에게 권할 수 없는 것이다.  이 권함을 한번 넘어가게 되면, 그다음엔 나의 옷차림, 도덕기준, 삶의 철학까지 침범해 오게 된다.


다음 날 나는 정중하게 H에게 할 말이 있다며 불러내서 내가 느낀 감정을 그대로 말했다.  상대방이 '나는 너 좋으라고 한 말이야'가 때로는 폭력이 되기도 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이 거리를 존중하지 않으면 너와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고도 단호하게 말했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상식이고, 내가 너보다 많이 알고 있고 너를 인도하며 가르치며 좋은 방향으로 이끌겠다는 마인드를 버리지 않으면 건강한 관계를 만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날 나는 무엇보다 '나 자신을 지키는 것'이 가장 우선순위라고 선포한 것이다. 환경보호처럼 대다수가 '선'이라고 생각하는 잣대라도 말이다.


H는 내 반응에 적잖이 놀라면서도 이때 '흠 이 사람 보통이 아니군, 더 마음에 든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나는 실패에도 보통 교훈을 잘 얻지 못하는 사람인데, 다행히 연애에서만큼은 예전 연애의 잘못을 다시 반복하지 않았다.  내가 애인의 기준에 들지 못할까 안절부절못하며 그의 기준에 나를 끼워 맞춘다면 나도 불행하지만 관계도 금방 유통기한을 맞이한다.  또한 나 자신을 가장 우선순위로 두고 연애를 하면, 나를 존중해주는 사람만 남기 마련이다.


나를 지키며 사랑하기 위해서는 은밀한 도덕적 권함에도 나는 '나무젓가락이 뭐 어때서?'라고 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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