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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응갸 Apr 14. 2023

사랑의 통화는 발행국마다 다르다. 2

윤 여사의 사랑은 ‘돈’이었다.







국민학교 2학년이 되던 해, 엄마는 내 손을 잡고 버스를 두 번,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도 15분을 걸어서 어느 마을에 도착했다. 아무리 비좁은 반지하 방이라도 8년 평생을 서울에서만 살아온 나에게는 아주 낯선 풍경이었다. 웬걸, 어디를 돌아봐도 논밭밖에 없는 땅 사이로 난데없이 높은 아파트가 간간이 들어서 있었다. 보이는 사람은 없는데, 아주 커다란 트럭들이 흙먼지를 날리며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시골인가 싶었지만, 그 어디에서도 ‘정감’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가 없었다. 사람도, 집도 없는 이상한 동네였다.



엄마는 여기저기 정신을 빼앗겨버린 내 손을 잡고, 얼마 없는 그 말쑥한 아파트 중 하나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로 19층, 내가 살던 집에 비해 19층 하고도 반이나 높은 이곳에 도대체 무슨 볼 일이 있단 말인가. 엄마는 제법 능숙하게 남의 집 현관키를 눌렀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도어락이 정말로 열렸다. 그녀는 나를 집 안으로 밀어 넣더니 명랑하게 외쳤다.



“이제부터 여기가 우리집이야! 여기, 네 방도 있어!”



태양과 가까워서 그런지, 통창 가득 쏟아지는 햇살이 참 호사스럽게 따뜻했다. 지층에서 흘러나오는 하수도 냄새도, 술 취한 어느 아저씨의 오줌줄기를 마주할 일도, 방구차 연기로 목이 멜 일도, 세 식구가 나란히 포개어 잘 일도 없었다. 그런데 딱 그만큼 슬펐다. 집이 좋아진 만큼.



누군가에게는 이 상황이 그저 반갑기만 할지 모르겠으나, 당시 나는 치밀어 오르는 배신감을 어찌할 길이 없었다. 가족의 일원으로서 그 고통을 나눠 지고 있다고 생각해 왔는데, 나만 이걸 모르고 있었다니! 생존의 위협과 사투하며 매일 마음 졸였던 나만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게다가 엄마는 우린 집이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감히 그 감정을 입 밖으로 표출할 수 없었다. 태어나 처음보는 표정으로, 해사롭게 웃고 있는 엄마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녀의 지금을 망칠 수 없었다. 그래, 어찌되었든 좋은 일이다. 나는 그녀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세 개나 되는 방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국민학생에서 초등학생으로, 옷을 갈아입는 봄이었다.








생각해보면 어린 나에게는 그것이 생존을 위협받는 가난이었고, 엄마에게는 아파트로 새 삶을 도약하기 위한 필사의 근검절약이었을 것이다. 나름 부유했던 집의 막내딸로 자란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학교도 가지 않은 딸에게 푸념을 늘어놓았을까? 어쩌면 내가 말귀를 못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해서, 어쩌면 이런 고민을 털어놓을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었을까? 엄마가 말한 ‘우리 집’이 ‘그 집’이 아님을 이해하는 지금은, 현재의 나보다 어렸을 엄마가 안쓰럽기도 하다. 내 시선으로 바라봐 많은 부분 편집됐을 그녀의 고민들이, 결혼을 하고 나니 한 사람의 삶으로서 새로이 보였다.



실망은 잠시 뿐, 나는 금세 ‘벌레’를 무서워하는 ‘신도시 키즈’로 다시 태어났다. 전깃줄도, 사잇길도, 낡은 집도 없는 서울의 북쪽 동네는 날로 커져갔다. 그렇다고 우리 집 경제사정이 많이 달라지진 않았다. 다만 바뀐 것이 있다면 엄마가 말한 ‘우리 집’이 무엇인지, 내가 그 의미를 알만큼 자랐다는 것뿐이었다. 반지하 방에서 신도시의 19층 아파트로 이어지는 고난의 행군이 실은, 매일 온몸으로 쏟아지는 햇살의 값을 치르기 위한 것이었음을.



엄마의 의지가 없었으면 언감생심 아파트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아빠는 그저 특출나게 성실해서, 조금의 빚도 크게 두려워했다. 엄마가 어떻게 아빠를 설득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녀 인생에 한 번 욕심을 부렸고 덜컥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그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엄마의 억척스러움 덕분에 누구보다 빨리 아파트 부금을 갚을 수 있었다. 신도시로 이사 온 이후에도 잔금 상환을 위해 악착같던 부모님 모습을 보며 자란 나는, 돈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알았다. 그래서 '당연하지 않은 당연한 것들'에 대해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상속받았다.



엄마는 ‘내 것, 네 것’이 명확한 사람이어서, 단 한 번도 내 세뱃돈에 욕심 내지 않았다.

아무리 자금 사정이 안 좋아도 내게 돈을 빌릴지 언정, 마음대로 가져간 적이 없다. 그리고 빌려간 돈은 꼭 이자까지 쳐서 후하게 돌려주었다. 그러면서 ‘네가 모은 돈은 네 돈이니 원하는 대로 해라’, 늘 말씀하셨지만 우리집에서 돈은 ‘함께 한 인내의 시간’ 그 자체였다. 그래서 나도 용돈을 모아 교복을 사거나 책을 사는데 보태곤 했다. 절대 극복할 수 없을 것 같던 수해의 현장, 반지하 방에서 가족이 다같이 열심히 흙탕물을 퍼 올리던 묘한 유대감을 양분삼아 무엇이든지 견뎌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나는 오랜 시간 엄마를 원망했다. ‘내가 원하는 방식의 사랑’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어떤 종류의 사랑’을 받았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한 시간이었다. 예민한 기질의 나는 항상 ‘정서적 지지’와 ‘긍정적 피드백’에 목말라 있었다. 부모님에게 칭찬받기 위해 발버둥 쳤고, 그건 늘 무산되기 마련이었다. 안타깝게도 그건, 부모님의 가장 취약한 지점이었던 것이다.


그러다 최근 상담을 받으면서 뒷통수를 세게 맞은 듯 번뜩 깨달은 것이 있다.




‘어쩌면 사랑의 통화는 발행국마다 다르지 않을까?’




부모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점을 의심한 적은 없지만, 그 사랑을 직접적으로 느낄 기회는 많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무엇으로 사랑을 지불 받았는가?

두 분은 감정을 표현하는데 많이 서툰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그들 나름대로 다른 방식으로 표현해오지 않았을까? 기억의 주머니를 뒤져보았다.



돈, 그래 돈이었다.



왜 이걸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직접적인 표현이었다. ‘누워 있는 옷 말고 서 있는 옷 사는 게 소원’이라던 윤 여사가 안 먹고, 안 입고, 안 쓰고 악착같이 모아둔 돈. 그냥 돈이 아니라, ‘어떻게 모았는지 내가 알아 버린 돈’ 말이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따뜻한 말 한마디 대신 턱턱 통장에 꽂아주던 소소한 그녀의 비자금. 돈 들어갈 일이라면 벌벌 떨며 당신들 것은 아끼고 나에게만 몰아주던 당신의 피 같은 돈. 통장에 찍힌 가상 숫자에 불과했던 돈이, 알고 보니 그녀가 조건 없이 쥐여준 귀한 조개 껍데기였던 것이다. 여태 그 용도를 몰라 패화를 받고도 난 받은 것이 없다며 눈 흘겼던 내 자신이 작아지는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발행한 화폐는 두 분에게 값어치가 있었을까? 나는 늦게나마 부모님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다양한 순간을 함께하고 싶었다. 그런데 어쩌면 이 역시 일방적인 욕심은 아니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얼마 전, 처음으로 엄마와 단 둘이 여행을 다녀왔다. 아직도 사랑을 갈구하는 어린이가 마음 속에 있는지, 나는 돌아오는 길에 카카오톡 프로필을 함께 찍은 사진으로 바꿨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엄마 프로필은 독사진뿐이었다. 당장에 전화를 걸어 따져 물었더니 ‘내 것, 네 것이 명확한 그녀’는 단칼에 잘라 말했다.


“싫어. 내 프로필인데 왜 남이랑 찍은 사진을 올리니? 내 맘대로 할 거야.”



물론 이 대답을 들었던 순간 서운한 나머지 배신감까지 느꼈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엄마에게는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그것으로 충분했던 것 같다. 애초에 그녀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계획했던 여행이었는데, 내 욕심을 채우지 못해 토라진 모양새가 영 좋지 않았다. 자식들의 단골 멘트, “엄만 맨날 그래.”를 이미 날려버린 참이었던 것이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얼마 전 아빠가 한 얘기도 일면 이해는 간다. 가족의 특별한 날에 공들여 짠 여행 계획을 듣고는 “좋은 날엔 각자 좋아하는 걸 하자. 난 혼자 낚시 다녀올게. 넌 엄마랑 놀아주든지.” 하고, 정말로 그날 낚시가방을 챙겨 혼자 떠났다. 따라나서겠다는 우리 모녀를 한사코 거절하면서. 그날은 엄마랑 같이 아빠의 무정함을 흉보면서 깔깔거렸더랬다.



하지만 비로소 상대의 진심을 이해했다고 해서 비어 있는 내 마음의 곳간이 괜찮은 것도 아니다. 다만 그녀가 내 통장에 숫자를 날릴 때 마다 ‘아, 엄마표 사랑이 오는구나.’ 하고 머리로 이해할 여유가 조금 생겼을 뿐이다. 나이 들면서 자연스럽게 엄마가 말한 ‘우리 집’의 진짜 의미를 알았듯이, 지금보다 더 성숙해지면 내 안의 어린아이도 조금은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선물은 ‘내’가 아니라 ‘상대’가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라고 하던데, 서로가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허기를 끌어안고 살아왔던 것은 아닐지 고민이 깊어진다. 엄마가 사랑을 ‘돈’으로 표현한다는 걸 알았으니, 이제 내 사랑을 표현할 차례다. 어쩌면 두 분도 내 사랑을 양 주머니 가득 받고도 그 의미를 모르고 있었을지 모른다. 두 분이 기대하던 형태로의 환전이 시급하다. 이왕지사 결혼하고 뻔뻔해진 마당에, 낯간지럽지만 직접 물어보려 한다.






엄마는 뭘 좋아해?
아빠는 뭘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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