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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르베 Oct 05. 2021

춤을 추고 싶을 때는 춤을 춰요.

<난 나의 춤을 춰>

아이들을 데리고 마트에 간 날이었다. 마트에 도착하니 자주 들어 익숙한 마트 홍보용 노래가 들렸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사야 할 물건들을 살피고 있는데 나의 노래처럼 아이의 몸도 음악에 반응했다. 춤을 추는 아이. 장난스럽게 추는 춤이긴 했지만 음악을 듣고 자연스럽게 춤을 추는 모습이 나에게는 신기한 모습이라 핸드폰을 꺼내어 그 모습을 저장했다. 마스크 위로 빼꼼 나온 두 눈이 가늘어진 채 춤을 추고 있는 아이가 사랑스럽고, 부러웠다.


대학 입학 후, 친구를 따라 재즈댄스 수업을 신청했던 적이 있었다. 생각해보니 그때의 나는 춤이라는 건 대학생이 되면 저절로 추게 되는 거라 생각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교실 사방에 붙은 전신 거울은 내 몸의 서툰 움직임을 숨길 작은 틈도 주지 않았으니 저절로 춤을 출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착각이었다는 걸 알게 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결혼 후 신혼집에 가져갈 짐 정리를 하던 중 신발장에서 그 당시 내 발을 무겁게 했던 재즈화를 찾았다. 하지만 그 재즈화를 나의 짐에 챙겨 넣지 않았다. 아마 다시 필요 없는 물건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음악에 따라 자연스럽게 몸의 리듬을 탄 아이를 보며 생각했다.


‘나도 저 만했을 때는 춤이라는 걸 추긴 했겠지? 난 언제부터 춤을 추지 않았을까.'


<난 나의 춤을 춰>는 꿀벌 옷을 입고 자기 춤을 즐기는 오데트의 이야기다. 오데트는 레오 다비드라는 작가를 좋아해 작가의 꿈을 갖고 있는 아이고, 달콤한 간식과 치즈가 듬뿍 올려진 스파게티 먹는 걸 좋아하는 아이다.

엄마 아빠에게 이런 오데트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사랑스러운 딸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니다. 그저 뚱뚱하고 실수 많은 아이일 뿐. 그런 주변의 시선 때문에 자신의 모습과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향한 마음을 멀리하며 위축되어가는 오데트의 모습이 보인다. 그 모습이 왠지 낯설지가 않다.


어렸을 때부터 입시를 시작하다 보니, ‘미술’ 외에 나의 것을 탐색해 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의외로 고지식한 면이 있는 기질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학업과 상관없어 보이는 일에 시간을 쓰는 모습들을 성실하지 않은 모습이라 생각하며 오로지 '입시'만 생각했다. 입시만 끝나면 다 하겠노라며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도, 무언가를 궁금해하는 마음도 모두 미루었다. 그런데 그렇게 숨기고 누르며 참았던 태도들이 습관이 되었는지 대학생이 되고 나서도, 또 그 이후 어른 생활을 하면서도 새롭게 시작하려는 것들을 시시하고 재미없다 느낄 때가 많았다.


얼마 전, 우연히 노래 한 곡을 들었다. 특유의 경쾌함에 종종 따라 불렀던 예전 그 노래, <DOC와 춤을>였다. 그런데 노래를 듣다 울컥했다. 이 노래를 듣고 울컥이라니. 덕분에 노래를 끝까지 따라 부르지 못했다.


“젓가락질 잘해야만 밥을 먹나요. 잘못해도 서툴러도 밥 잘 먹어요. ……청바지 입고서 회사에 가도 깔끔하기만 하면 괜찮을 텐데, 여름 교복이 반바지라면 깔끔하고 시원해 괜찮을 텐데.


사람들 눈 의식하지 말아요. 즐기면서 살아갈 수 있어요. 내 개성에 사는 이 세상이에요. 자신을 만들어봐요.


춤을 추고 싶을 때는 춤을 춰요. 할아버지, 할머니도 춤을 춰요……. 그깟 나이 무슨 상관이에요. 다 함께 춤을 춰 봐요.

억지로 빗어 넘긴 머리, 약한 모습이에요. 감추지 마요. 빡빡 밀어요.”


노래를 듣다 지난 생각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입시 이외에 무언가를 좋아하고 싶은 마음, 무언가를 궁금해하는 마음들을 숨기려고 애쓴 모습들이 억지로 빗어 넘긴 약한 모습 같았다. 춤 한 번 추는 일이 어렵고, 좋아하는 것을 탐하는 일에 서툴고, 새로움에도 주춤했던 지난 나의 모습이 내가 나를 제대로 만들어 오지 못한 모습 같아 안타깝고, 속상하고 슬펐다. 그 마음이 마트에서 춤을 추는 아이의 모습과 겹쳐졌다.


마트 한가운데에서 노래를 듣고 춤을 추는 아이처럼  이제라도 주변 눈치 보지 않고 그 순간의 나를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싶어졌다. 그 마음 탓에 지금 하는 글쓰기도, 그림책을 좋아하는 마음도, 또 그 어떤 것도 서툴고 부족하더라도 그대로 지키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그 욕심에 자꾸 무언가를 하고 싶어 진다. 막춤도 추고 싶고, 노래도 부르고 싶고, 양말 짝이 맞지 않아도 괜찮은 마음도 키우고 싶어 진다. 억지로 묶어 두었던 마음이 조금씩 느슨해지니 '에잇, 모르겠다'라는 마음이 자란다.


가족끼리 가볍게 여행을 다녀왔다. 야외 식당이라 노래 불러주는 분이 신청곡을 받는다고 하시면서, 혹시 노래를 직접 부르고 싶은 분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하셨다. 손을 들 뻔했다. 노래를 잘 부르는 것도, 준비된 노래가 있는 것도 아닌데 손을 들 뻔했다. 그 꿈틀대는 마음이 웃겨 혼자 큭큭대다 남편에게 말했다. ‘ 나 진짜 웃기지 않아?’ 나의 속사정을 아는 남편이 '그럴 수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책을 읽어주는 목소리에 조금 생기가 생겼다. 녹음하여 지인에게 들려주니 제법이라 했다. 아이들과 춤을 춘다. 막춤이다. 베란다 유리창에 막춤을 추는 내 모습이 비친다. 여전히 뻣뻣하고 여전히 서툴다. 그 모습을 보며 예전처럼 숨고 싶은 마음을 내 보이는 대신 춤추는 내 모습이 웃기니 그냥 웃기로 했다. 노래도 부른다. 언제 한 번 손 들어 보는 날이 오지 않을까 싶어 그냥 부른다. 혹시 모르니 곡명도 정했다. '에잇, 모르겠다!' 그냥 그러기로 했다.


꿀벌옷을 입고 거울 앞에서 칫둠칫 춤을 추는 오데트의 표정이  좋다. 억지로 빗어 넘긴 모습 같지 않아 좋고, 사람들  의식 않고 즐기면서 살아가려는 모습 같아 좋고, 자신을  만들어가는 모습 같아 좋다.


그냥 그러는 모습, 자연스러워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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