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의 딸이 의대를 갔을 때 평가 요소에도 포함되지 않는 표창장을 위조했다는 이유(검사들은 어떻게 위조를 했는지를 증거 하지 못했지만, 위조를 했다고 판결이 났다.) 정경심 교수는 징역 4년, 딸 조민은 의대입학이 취소되었다. 최강욱 의원은 조국의 아들의 허위 인턴 작성으로 국회의원을 상실하기도 했다. 이제는 세상이 고위 공직자의 권위가 자녀에게 불공정한 혜택을 주는 것을 징역으로 처단하는 공정한 사회가 된 것 같았다.
하지만, 자산이 108억인 검찰총장의 후보자의 자녀는 서민에게 주려는 정책금융을 받아서 쓰고, 문과의 아들은 교장과 교사 추천으로 이과생에게 주는 장학금으로 대학학비 전액을 받았지만 뇌물에 대한 조사가 없다. 또 어느 전 장관님의 딸은 해외 유수의 대학 입시에 도움이 되도록 주 40시간씩 10년을 해야 달성할 수 있는 봉사활동 2만 시간과 대학교수도 어렵다는 두 달 만에 논문 5개, 전자책 4권을 고1에 썼다는 것에 대해서는 묵인했다.
그리고, 누구는 주가조작 세력과 함께 23억의 이익을 얻었지만 주가조작이 아니고, 300만원의 명품백을 받아도 뇌물이 아니다.
이들의 성공은 정당한 노력의 대가가 아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지위에서의 성공이
정당한 노력의 대가가 아닌데,
성공이 노력의 대가라고 말하는
능력주의가 맞을까?
'성공이 운'이라는 말은 '故신해철'님의 '메디치의 강연'에서 처음 들었다. 워낙에 급진적인 사고를 이야기하는 사람이라서, 당시의 그 말은 그저 철학자의 설파 같았다. 그의 말의 요지는 성공이 운이니까 성공을 이루지 못한 우리의 노력을 자책하지 말라는 것 정도와 노력이 운을 담지 못 했어도 ‘노력은 나를 설명한다.’는 말로 우리의 노력을 추대하는 느낌정도가 기억된다.
그리고, 10여 년이 지나서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센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또 같은 이야기를 보았다.
네가 노력했는데, 성과 없어?
그건 네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야.
네 성과를 갈취하는 부류가 있기 때문이야.
결국 나는 능력주의가 강조하는 성공은 사실 능력이 아니라 운이 좌우한다는 말에 결국 공감했다.
성공한 스포츠 스타의 신체적 능력은 스스로 만든 것과 타고난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좌우할까?
성공한 스포츠 스타보다 노력한 선수가 없었을까?
학자금 대출이 없는 자와 학자금 대출에 생활비까지 벌어야 하는 사람 중 누가 높은 학점에 좋은 스펙을 쌓기가 유리할까?
학자금의 시작점은 노력으로 얻은 것일까?
잘 생기고 예쁜 사람에게 더욱 관대한 시대에 외모가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일까?
외모가 뛰어난 사람과 외모가 혐오스러운 사람이 같은 노력을 했을 때 같은 성과를 얻을 수 있을까?
외모의 차이를 만든 운이 성공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을까?
성공의 과정에서 필요한 운은 차치하더라도 시작점에서의 현격한 운의 차이가 성과와 직결됨에도
성공의 원인을 능력의 차이에 두어야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화를 선점함으로서 얻은 성과독점에도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고 한다.
응. 능력주의는
자본주의에서 상위를 선점한 부류의
정당성을 갖기 위한 이념이야.
물론, 모든 성공을 폄하하는 것으로 오해하면 부분의 예를 전체로 치환하여 반박하는 논리적 오류다. 성공을 운이라고 말하는 맥락이 그게 아니다.
김연아의 노력과 유재석의 성공의 노력을 운으로만 폄하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국종 교수의 정당한 노력의 성과나 대한민국을 이뤄낸 독립운동가들의 노력에 대한 성과는 정당하지 않았다.(심지어, 정신 나간 만화가는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게을러서 가난하다는 멍청한 오류로 독립운동가들의 명예를 훼손해도 이 나라에서는 표현의 자유가 된다.) 삶을 바쳐서 노력하고도 그에 맞는 보상을 받지 못하는 노력이 얼마나 많은지를 돌아보면, 내 노력이 성공을 이루지 못했어도 성과가 노력에 비례하지 않음을 알고 내 노력을 자기 스스로는 알아줘야 한다. 그리고, 성과를 이루지 못한 타인의 노력을 마주 했을 때도 그의 노력에 찬사를 보낼 줄 알아야 한다.
굳이 일본의 적산으로 부를 이룬 기업이나 매국으로 얻은 재산을 유지하여 현재의 부를 가진 배부른 매국노의 자식들, 그리고 성공한 쿠데타의 자식들의 되물림 되어온 부와 명성을 언급하지 않아도 현재 우리나라의 '성공'은 '편법' 혹은 '불법'으로 얻은 성과마저 능력으로 보는 착시가 많다. 그래서, 마이클센델이' 능력주의는 공정함을 상실했다.'라고 한 말에 격렬히 공감한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불공정한 성공을
정의롭게 파괴하자는 것이 아니야.
저들의 능력주의적 오만보다 무서운 건 우리의 패배감과 자기 비하다.
저들이 자본주의에서 선점한 위치는 우리는 잘 보이지 않는 운으로 따라가기 어려울지 모른다. 적어도 이 능력주의에서 저들에게 진 것은 나의 노력이 아니라 공정하지 못한 운의 탓일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행복마저 성과에 있다면 우리는 행복할 기회마저 희박한 운으로 얻지 못하는 셈이다.
물론 돈이 많고 직급도 높다면 행복의 선택권이 더 많겠지만, 우리는 돈이 없고 직급이 낮아도 행복할 수 있다. 시작부터 운이 더 좋은 자가 부럽지만, 저들의 결과만이 행복은 아니다.
그렇지만, 내가 인정하는 노력과 헌신을 한 분들이 불공정한 독점으로 성과를 가진 자들보다 보상을 받지 못하고, 심지어 폄하되고 조롱까지 받는 현실에 대한 분노마저 사그라들지는 않더라..
내가 영감을 주는 책들을 우연히 잡할 수 있었고, 그렇게 잡한 책들이 쌓여서 자주적 사고를 할 수 있으며, 지금 누워서 이 글을 쓸 수 있도록 문명을 누릴 수 있는 운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굳이 나와 같은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조선시대의 왕과 비교하지 않아도 나는 이 타자를 누르면서 내 생각을 쓰는 것으로 행복하다.
물론,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욕망과 한계에서 막막하고 절망한다. 그리고 내 삶에 이런 절망감이 없었던 적도 얼마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해소 되지 않은 욕망이 있어도 행복에 도취되어 설레이곤 한다.
너는..??
너는 뭘 좋아해??
잠깐 즐기면 사라져 버리는 쾌락도 좋지만,
잠들지 못할 정도로
너를 설레게 하는 그거 말이야.
아침에 딸아이에게 훈육을 핑계 삼아 짜증을 냈는데, 쫓아 내 듯 등굣길로 보내자마자 딸아이 작은 잘 못을 부풀려 내 화풀이 희생양으로 삼았던 미안함에 오전 내내 불편했었다. 불편한 마음을 해소하지 못하고 반나절을 보내고 있었지만, 집에 돌아온 딸아이에게 사과하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나니 너무 행복했다.
이건 이기적으로 나의 불편한 감정을 해소할 수 있었기 때문이고, 딸아이가 나를 어떻게 이해를 했을지조차 자위적으로 해석하며 얻는 안도감일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이 행복을 누구에도 공감이나 인정을 받을 필요가 없다.
좋은 차와 좋은 집, 화려한 일상과 많은 통장 잔고 따위로 누군가와 비교해서 오는 그런 거 말고 나의 입장에서 행복을 바라보는 사람이 많으면 좋겠다.
물론 나의 이런 생각은 누군가를 계몽하려는 거만함일 수도 있지만, 그래야 나쁜 놈들이 가진 것을 추대하며 나라를 파는 놈들에게 아첨을 떠는 것들이 좀 사라질 것 같은 개인적 욕심이기도 하다.
젊은 날이 지나서야
상실감으로 젊었음을 깨닫는 건
아깝잖아.
능력주의에서 강요하는 행복은 불공정한 성공마저 능력이라는 착시를 만든다. 그리고 우리의 행복이 그들보다 못하다는 이유로 분노하고 패배감을 느끼면서도 자본주의 경쟁의 불공정은 묵인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의 좀 더 많은 행복을 위해서라도 저들이 선점한 불공정에 분노해야 하지만, 그 이전에 우리의 행복이 저들과 같은 성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으면 좋겠다..
불공정을 능력으로 포장하고,
우리의 노력을 폄하하게 만드는
능력주의의 오만을 경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