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가장 치열했던 젊은 날을 기억하세요?
그녀의 노량진 탈출기
“우리 애가 이번에 합격했어요! 이게 다 선생님 덕분입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합격소식을 듣자마자 감격한 그녀의 아버지가 내게 전화로 소식을 알렸다. 1년 만에 걸려온 전화 속 그의 목소리는 약간 울먹이는 듯했는데 매우 흥분한 상태였다. 얼마나 기뻤으면 아버님이 직접 내게 전화를 하셨을까. 방송 일을 하는 내게 인터뷰했던 사람의 합격소식을 듣는 것은 흔치 않은 경험이자 가장 뿌듯한 순간이었다.
2011년 2월, 노량진 공무원 학원가를 촬영할 때의 일이다. 노량진역을 나와 육교 하나를 건너면 공무원 학원가 곳곳에 '합격'이라는 간판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마치 이 곳으로 들어서면 합격은 보장된 것 같았다. 학원가에서 쏟아져 나오는 공시생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꾸미지 않은 운동복 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한쪽 옆구리에는 두꺼운 책을 끼고 있었다. 바지 엉덩이 부분이 얼마나 반짝반짝 광이 나는지를 보면 그들이 이곳에 머문 시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학원가 앞에 줄지어선 포장마차에서 컵밥 하나로 간단하게 끼니를 때우면서 시간을 아끼는 사람들, 고시원 식당에서 말없이 밥을 먹으면서 한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사람들, 그들은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았다.
노량진 학원가보다 고시촌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이곳은 지금까지 했던 촬영 중에 난이도로 따지자면 ‘상’에 속했다. 누구도 합격하기 전에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게 알려지는 걸 꺼려했고, 공부할 시간을 쪼개 인터뷰에 응해줄 만큼 여유가 없었다. 시험일정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은 예민한 상태여서 혹시라도 방송 촬영이 시험성적에 영향을 주면 안 되기 때문에 더 조심스러운 촬영이었다. 일이 이렇다 보니 계속 거절당하고 심지어 인터뷰하기 싫다며 도망가는 사람도 있었다. 난 의욕도 꺾이고 많이 지쳐있었다.
그러다 골목으로 승용차 한 대가 들어와 내 앞에 멈춰 섰다. 차에서 부모님과 여학생이 내렸고, 그들은 곧바로 커다란 짐 보따리를 꺼내기 시작했다. 한가득 싣고 온 짐의 양으로 봐서 그녀는 공무원 시험을 처음 준비하는 게 틀림없었다. 이건 무조건 찍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용기를 내 섭외에 들어갔다. 짐을 옮기느라 정신없는 틈을 이용해 허락을 받았다.
짐을 다 옮기고 다니 그제야 내가 방에 같이 있다는 걸 알고 부모님은 인터뷰를 거절하셨다. 이대로 포기하고 나와야 하나 잠시 고민하는데 창밖을 보니 해가 지고 있었다. 오늘 내가 한 첫 번째 인터뷰이었고 이제 막 녹화를 시작했는데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오늘의 실적은 제로였기 때문이다. 방에서 안 나가고 계속 매달리면서 설득했다. 20분쯤 버티자 포기한 듯 촬영을 허락해주셨다. 섭외 과정에서 나의 집요함이 발휘되면 이렇게 촬영 허락을 받는 일도 종종 있었다.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이 가족은 대구에서 왔다고 했다. 학교를 휴학하고 법원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무작정 노량진행을 선택한 여학생의 나이는 24살, 자그마한 체구에 동글동글하니 앳된 얼굴이었다. 부모님은 가족과 처음 떨어져 지내게 될 딸이 걱정됐지만, 목표가 뚜렷한 딸의 선택을 지지해주기로 했단다. 그녀에게 노량진의 첫인상을 물었다.
“여기 딱 내리니까 전부 운동복 차림에 뒤로 메는 책가방에 우글우글하는 거 보고, 전부 다른 사람 시선은 신경 안 쓰고 진짜 공부만 열심히 하는 그런 모습 보니까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았어요. 진짜 책만 보고 열심히 해야겠다는 느낌? 아, 이제 자유는 없구나.”
다음날 그녀의 아버지는 집 앞 골목길에서 첫 학원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딸을 기다렸다. 멀리서 딸의 모습이 보이자 달려가 그녀의 손을 잡고 수업이 어땠는지 물어보는 아버지는 참 자상한 분이셨다.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는 밥을 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가족끼리 한자리에서 마주할 수 있는 마지막 식사였다. 앞으로는 계속 혼자 밥을 먹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어서였을까 그녀의 표정이 시무룩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스무 살이 훌쩍 넘은 딸에게 어린애 대하듯 이것저것 잘 챙겨 먹을 것을 당부하셨고, 아버지는 최선을 다하라며 크게 안아주고는 떠나셨다.
“남자나 여자나 뜻이 있고 목표가 있어야 되는 것인데
한번 시작하면 끝을 봐야지. 네 인생 살아가는 데 있어서 너 편하라고 하는 거니까 좌우지간 최선을 다해.”
그녀는 차가 멀어지는 걸 보고 서 있다가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혼잣말로 '잘할 수 있어'라고 스스로를 보듬었다.
“이제 혼자 남았네요. 별로 안 슬플 줄 알았는데 좀 슬퍼요.
잘할 수 있어! 잘하려고 온 거니까 괜찮아요. 저만 혼자 있는 거 아니잖아요.”
그녀의 홀로서기가 시작된 것이었다. 노량진이라는 섬에 스스로를 가두고 합격하기 전까지 나오지 않는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안타깝지만 그게 취업하기 어려운 나라, 대한민국의 현실이었다. 안정된 직장이라는 개념이 사라진 지 오래였고, 명문대를 졸업해도 취업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많은 취업준비생들은 공무원이 되는 걸 선택했다. 그렇게 노량진 고시촌으로 모여드는 청춘들은 모두가 '합격'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젊음을 불태우고 있었다. 난 그녀의 부모님이 떠나고 혼자 지내는 그녀를 촬영해야 한다는 이유로 이틀 동안 더 만났다. 촬영 마지막 날, 우리가 헤어질 시간이 된 걸 알고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이제 마지막이에요? 내 유일한 말동무였는데... 이제 말할 사람도 없고... 그래도 혼자 이겨 가야 되는 과정이니까 이제 뒤돌아보지 말고 제가 해야 될 일 열심히 잘하면서 좋은 소식 전해드릴게요.”
그리고 1년 뒤 그녀는 첫 시험에서 한 번에 합격했고, 잊지 않고 나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왔다. 그녀가 그 어렵다던 시험에서 한 번에 합격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정말 뜻밖이었다. 방송이 나간 뒤에 학원가에서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꽤 많았고, 그 때문에 공부를 소홀히 할 수 없었단다. 잠시 마음이 흐트러질 때에도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여서 그녀는 ' 빨리 이곳을 떠나야겠다'라고 마음먹고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다. 그 결과 합격행 티켓을 손에 넣고 노량진을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딸이 단기간에 합격할 수 있게 해 준 게 '방송의 힘'이라고 믿으셨다. 얼떨결에 난 한 명의 공시생을 합격시키는 데 큰 공을 세우게 됐다. 이럴 때 난 방송이 순기능을 제대로 발휘했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합격에 자신감을 얻은 나는 섭외가 힘들 때마다 '내 카메라에 찍히면 좋은 일이 생긴다' 라며 사람들을 설득했다. 그러면 몇몇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인터뷰에 응해주기도 했다. 그들은 내 카메라의 힘을 믿고 싶어 할 정도로 절실해 보였는데 그 간절한 바람이 통했던 걸까. 그 후로 정말 신기하게도 내 카메라에 담겼던 사람들은 기쁜 소식을 전하러 내게 다시 연락해왔다.
"정말 제가 그 카메라에 찍혀서 합격했나 봐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