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 만점 영화 02
<로마>를 결국 극장에서 봤다. 개봉한 지 3개월이 넘었기에 아직도 상영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아카데미의 수혈을 받은 건지 여전히 몇몇 극장들에서 상영을 하고 있었다. 사운드가 정말 중요한 영화라고 해서 돌비 시스템을 갖춘 메가박스 코엑스 MX관에서 봤는데, 영화를 보는 내내 넷플릭스를 켠 노트북 앞이 아니라 극장에 있다는 점이 너무 다행으로 여겨졌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 영화는 언제나 관객들을 다른 시공간 안으로 들여놓지만, 돌비 사운드로 본 <로마>의 현장감은 특히 압도적이었다.
<로마>의 사실감은 연출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종종 잊게 만들 정도로 완벽에 가까운 장면장면의 디테일에서 나온다. 물론 이것이 단지 1970년의 멕시코를 실감 나게 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패닝하는 카메라에 맞춰 완벽하게 움직이는 인물의 동선, 완벽한 순간에 프레임에 들어가는 비행기 등 이 영화의 완벽한 디테일은 미학적인 완성도로 이어진다.
이 영화를 보기 전에 미리 알아두면 좋은 것들, 이를테면 멕시코의 역사적 사건 같은 것을 알아두면 좋긴 하지만, 몰라도 감상에 별 지장은 없다. 다만 한 가지, '로마'가 이탈리아의 도시 로마가 아니라 멕시코시티 내의 마을 로마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은 꼭 알아두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나처럼 왜 이탈리아에서 다들 스페인어를 쓰는지 의아해하는 일이 생길 수 있다.
<로마>를 보며 형식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거리감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어떤 장면에서는 얼마나 가깝고 멀리 찍어야 된다는 관습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매 장면마다 찍는 대상과 얼마나 떨어져서 찍어야 될지를 고민한 것 같다. 그래서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어도 걸작으로 불리는 영화 특유의 미학적 확신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이 영화에서는 가까이서 벌어지는 일과 멀리서 벌어지는 일을 동시에 찍은 장면이 많다. 이는 이미지뿐 아니라 사운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일반적으로는 A와 B를 따로 찍었을 장면에서도 최대한 둘을 같이 찍는다. 가까이서 선명하게 들리는 소리와 함께 멀리서 흐릿하게 들리는 소리를 담아낸다. 아래의 스틸컷들을 보면 어떤 느낌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스틸컷이 아니라 사진 작가의 작품들 같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전작들을 생각나게 하는 장면들이 흥미로웠다. 인큐베이터 장면을 포함하여 생과 사가 교차하는 모티브, 후반부의 원테이크 장면은 <칠드런 오브 맨>이 떠올랐다. 영화관 장면에서 삽입된 영화 <우주 탈출>과 후반부 인물들이 바다에서 걸어 나오는 장면은 <그래비티>와 유사했다. (<우주 탈출>은 실제 <그래비티>의 모티브가 된 것으로 추측된다.)
김혜리 만점 영화 중 첫 번째로 다룬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과도 비슷한 부분들이 있었다. 일단 두 영화 모두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당시의 시공간을 최대한 재현하지만, 결국은 보편적인 이야기를 한다. 또한 <로마>에서는 가장 중요해 보이는 자동차를 비롯해서 비행기, 강아지 등이 반복해서 등장하는데, 이렇게 도드라지지 않으면서도 효과적인 상징들이 많다는 점도 비슷하다. 여성 캐릭터들과 남성 캐릭터들이 대비되는 양상도 유사하다. 다만 <로마>의 두 남자 캐릭터는 공감의 여지없는 말 그대로 나쁜 놈들이라는 점은 다르긴 하다. 반면 두 영화는 결정적인 차이도 있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캐릭터들은 일종의 상징으로서 역사의 일부를 보여주는 기능을 한다. 생생한 캐릭터들이 등장하지만 영화가 결국 보여주고 싶은 것은 1970년대 대만의 풍경이다. 반면 <로마>는 영화가 진행될수록 역사보다는 개인, 특히 클레오라는 인물에게 집중하게 된다. 그래서 역사를 바탕으로 하고 놀라운 수준으로 당시의 공기를 재현해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아주 사적인 영화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