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으로 안다고 말할 때까지
시급 3200원. 아침 10시에서 오후 3시까지니까 하루 3200원 x5시간=16000원, 주급 (월~토) 16000원 x6일=96000원, 월급은 대략 4주로 계산하면 384,000원이다. 38만 원 돈. 적은 금액이라 여겼지만 첫 알바였고, 아무것도 몰랐고, 어떻게든 해서 돈은 벌어야 했기에 혜림은 상관없었다. 그리고 점심을 주지 않는가! 순박한 혜림으로선 점심을 먹는 시간은 노동의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공돈, 공짜밥이 덤으로 주어지는 것 알짜배기라 여겼다. 그러니 찬물, 더운물을 가릴 것이 없었다. 기회가 오면 우선 놓치지 않아야 한다.
예상대로 복사와 팩스 업무는 두 주가 지나도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았다. 몸이 얼면 팩스번호를 누르고 용지를 넣는 건지, 용지를 넣고 팩스 번호를 누르는 건지 매번 헷갈려서 사용순서가 적힌 메모를 의지해야 했다. 보낼 서류를 뒤집어 팩스를 보내는 일이 부지기수였고 그래서 발송여부를 재차 확인하는 전화를 일일이 하며 그 실수를 메꾸어야 했다. 또 그렇게 해야 안심이 되기도 했다. 혜림도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팩스에서 울리는 "삐~" 소리는 왜 그리도 거슬리는지. 찌르는 듯한 차가운 기계음이 계속해서 신경을 곤두세웠다.
복사기 사용은 더욱 난관이었다. 얘는 사용법도 적혀 있지 않았다! 서류든, 통장이든, 여권이든, 신분증이 눈앞에 떨어지면 손님의 요구사항대로 능숙하게 말끔히 처리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양면 복사라는 난관에 맞닥뜨리기만 하면 불안부터 앞섰다. 그래서 앞면 먼저 복사한 종이를 꺼내 이리저리 방향을 재보다 뒤집어 넣는 수동방법을 몰래 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럴 수가! 결과는 오히려 예상 밖이었다. 혜림은 숨이 턱 막혔고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후끈후끈 열이 올라왔다.
이외에도 순서대로 수십 장의 용지를 묶음 단위로 자동 복사하기, 한 장에 2~4면 이상 나오도록 복사하는 방법을 알아야 했다. A4 용지를 A3나 B5로 확대하거나 축소하는 것은 전자버튼 화면에 표시된 비율만 보아도 머리가 아찔했다. 게다가 한꺼번에 들이닥치는 손님들이 초짜알바의 행동을 예리하게 쳐다보며 마냥 주시하는 상황 앞에서는 자연히 머릿속이 하얘지고 텅 비어 버리는 현상이 수시로 나타났다. 그러면 건너편에서 도장을 새기는 주인장의 꾹꾹 눌러 담는 숨소리가 여과 없이 전달되어 매장 안 공기를 가득 채워나갔다.
어느 날은 참다못한 주인장이 발딱 일어섰다. 앙 다문 입술이 혜림을 향하여 조근조근 움직이는데 밖으로 터져 나오는 모든 단어는 자음과 모음이 다 분절되어서 사방으로 한꺼번에 흩어지는 것 같았다. 때마다 잘못 인쇄된 종이값과 토너비를 운운하는 소리도 귓바퀴 너머에서 들어야 했다. 혜림은 자책하듯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주인장의 불편한 심기를 낮추고자 냉혹한 기계를 끌어안고 날마다 복사기와 씨름을 했다. 그런데도 쩔쩔매는 모양새가 줄어든다 싶으면 한 번씩 종이가 걸려 복사기도 얼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혜림의 심장도 그대로 멎어버리는 듯했다.
종이 트레이가 설치된 복사기 안쪽면에는 기계를 분리해 종이를 빼내는 방법이 친절하게 그림으로 적혀 있는 대형 스티커가 부착되어 있었다. 하지만 기계치인 혜림으로선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도대체 뭘 하라는 건지 도통 해석이 되지 않았다. 그림 이미지와 실체는 따로 겉돌아 어느 부품을 어떻게 분리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든 해결해 보겠다고 종이를 우격다짐으로 꺼내다 사이에 낀 종이가 찢겨 나가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러면 SOS로 다급히 부른 주인장 앞에선 고개조차 들 수 없었다. 혜림은 이 요란한 복사기 앞에서 날마다 마주하는 낯선 손님들과 웃음기는 점점 찾아볼 수 없는 주인장 앞에서 수시로 심장을 쓸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가 정말 나쁜 건가 하는 자아비판의 강도는 혜림의 둔감한 몸이 점점 기계에 적응해 가면서 줄어들었다. 머리로 인식하는 것보다 몸이 자동화되기까지는 일정 시간이 필요했다.
17세, 고 1 아들의 동공이 점점 확대되었다.
" 엄마, 그랬던 거야? 아... 난 못하겠다. 못하겠어. "
혜림은 피식 웃었다.
"그래도 너희는 우리 때보단 나아~. 지금은 손 끝에서 스마트폰만 펼치면 알바생들이 보통 경험하는 기기나 관련 업종 영상을 통해 미리 찾아보고 공부할 수 있잖아. 자주 물어보다 겪는 민망함도 적을 거고. "
"그래도 처음 해 보는 거였잖아~~. 엄마 힘들었겠다~~. "
혜림의 아들은 머릿속에 이미지화된 고지식한 똘똘이 스머프 주인장을 떠올리며 웃음이 사라졌다. 편의점 알바를 하면 그런 주인장들이 대다수일지도 모른다. 나도 엄마처럼 할 수 있을까.
" 아들~ 알바 하면, 직장 다니면, 누가 처음부터 친절하게 하나하나, 세세하게 가르쳐 줄 것 같지? 천만의 말씀! 그냥 던져지면서 몸으로 먼저 때우더라고. 그런데 배운 대로 머리가 같이 안 돌아가는 게 문제야. 몸이 적응하면서 배우더라고. 엄마 학교 근무할 때도 그랬어. 교육과정 책 주고, 교실 한 켠 던져 주고 날라오는 업무지시와 함께 바로 수업하면 된다 하더라고. 하면서 배우는 거야. 유연해질 때까지, 능숙해질 때까지. 그런데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 걸려. 그 와중에 실수도 많이 하고 상처도 많이 받지. 그렇게 실전에 임하더라고. 알바는 용돈 벌이보다는 글쎄... 직장 생활하기 전에 갖추어야 할 담력과 사회 적응력을 경험해 보고 키우는 실험적 시간인 것 같아."
혜림은 갑자기 무언가 빠뜨린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어 잠시 생각하다 이내 아들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 대부분 반복적인 업무능력은 시간이 지나면 키워지고 갖추어져. 그런데 그 안에서 내 감정을 만나고, 확인하고, 다루는 능력은 아무도 가르쳐 준 적이 없었어. 그냥 방치되는 거지. 사실 그게 더 중요한데 말이야. 낯선 상황 속에서 일하다 보면 내 안의 무의식적인 감정도 수시로 쏟아져 나옴을 보게 되지. 초조함, 불안, 당황스러움, 수치심, 민망함, 공포, 분노, 눈치보기, 자기 비난 같은 감정 말이야. 그걸 안아주고, 토닥여주고, 그럴 수도 있다며 용기를 북돋워 주고, 괜찮다 말해 주는 게 정말 필요해. 안 그러면 일을 마치고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하루 종일 그 감정에 휩싸이니까. 그러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며칠 일하다 쉽게 그만둘 수도 있어. 실수해도 잘못해도 그날 하루 충분히 잘했다며 자신을 칭찬해 주어야지. 네 말처럼 주어진 하루하루는 날마다 처음이잖아. 끝나고 맛난 떢볶이나 아이스크림도 자신에게 사주면 더 좋고. 쓸려고 버는 거니까... "
" 어, 엄마. 그래서 엄마는 거기서 얼마큼 일했어? "
" 한 달 하고 절반? 그만두지 않고..., 잘렸어. "
" 왜?"
" 생각보다 손님도 많지 않았고. 아르바이트생을 처음 쓰다가 두 부부가 그냥 둘이서 할 만하다 생각했나 보지. 2주 하고 나니까 토요일에는 손님이 없다며 중간에 집에 가라고 하더라? 내가 대기근무조도 아닌데 말이야. 그래서 속이 쓰라렸어. 내 시급이 팍팍 줄어드는 거잖아. 나중에는 토요일에 아예 나오지 말라 하더라고. 한 달 38만 원 돈 벌려했었는데, 30만 원 조금 넘게 겨우 받았던 것 같아. "
" 아~, 짜다~ 짜."
지금은 때마다 최저시급 논란으로 뉴스가 장식된다. 2025년 최저시급은 10,030원이다. 혜림은 문득 '2000년 알바 최저 시급'을 검색해 보고 싶어졌다. 최저시급이 1600원이었단다. 어? 그럼 나는 최저시급의 2배였었네? 괜찮았던 거였나?
" 2000년도 알바 최저 시급이 1600원이라 해서 엄마는 그것보다 2배 이상 받은 거라는 걸 오늘 알았네. 그런데 네 말대로 엄마도 그 돈이 넘 짜다 느꼈었어. 그래서 그런가? 문구점 알바는 다시 하고 싶지 않아. 좋은 감정보다는 숨 막히고 삭막하다는 느낌으로 남아 있어서. "
" 나쁜 기억이 또 있었어?"
" 어, 주인이 점심시간에 오징어덮밥과 비빔밥 중에서 둘 중 하나만 시켜 주었어. 특히 오징어덮밥을 자주! 언제 올지 모르는 손님을 신경 쓰며 한쪽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같은 메뉴를 매일 먹어봐. 정말 고역이더라고. 배고프면 모든 다 맛있는 때인데도 배만 채우는 느낌이었어. 그래서 지금도 오징어 볶음을 그닥 좋아하지 않나 봐."
혜림의 아들은 짓궂게 웃으며 엄마를 놀렸다.
" 오늘 저녁 오징어 덮밥 먹어야겠다~ "
" 네가 다~ 먹어라. 질릴 정도로 매일 해 주마~~. 오징어 다리만 봐도 무서울 정도로. 하하하 "
엄마와 아들은 까르르 웃었다. 그리고 달콤한 케이크 한 조각을 꺼내 스푼 가득 입에 넣었다. 웃음 뒤에 숨겨진 지난날의 씁쓸한 감정을 그렇게 녹여 버리니 문구 알바도 꽤 괜찮았던 것 같게 느껴졌다. 어쨌든 그때의 경험으로 교무실과 연구실, 행정실에서 복사기나 팩스를 사용할 때에는 노련하게 대처하고 있으니 말이다. 기기 다루기에 서툰 새내기 교사를 이해하며 친절하게 도울 수 있는 여유는 덤으로 가졌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