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닝 글로리 (3)

기억은 사실 여러 색깔이에요.

by 빛나는 숲 손호림

사실 혜림이 기대한 문구점 알바는 물건 포장과 계산이었다. 돈을 직접 만져보는 기쁨! 내것은 아니나 마치 내 것인 것처럼 매출액을 직접 확인하고픈 마음은 혜림이 주인의식과 책임감을 지닌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가게 주인은 복사와 팩스 보내기 외의 시간에는 여러 팬시용품과 사무용품들을 가지런히 반복해서 정리하게 하거나, 마른 수건을 들고 시시각각 먼지를 닦게 했다. 몸의 근육이 약해짐을 느낄 정도로 이 단순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작업은 정말 따분했다. 더디게 가는 시간을 재촉하고 싶어 종소리에 맞춰 들어오는 손님이 그렇게 반가울 정도였다. 낭랑하고 활기찬 목소리로 혜림의 탁 트인 음성이 가게 안의 정적을 가끔씩 깨뜨려 숨을 쉬게 만들었다. 다행히 이 점은 주인장도 좋아하는 것 같았다. 한편 주인장의 아내는 현금박스 앞을 항상 지키고 있었다. 으레껏 장착된 억지미소를 잃지 않고 손님들이 집어온 물건을 가끔씩 포장하거나 카드를 받거나 거스름돈을 내주었다. 수기장부에 누적된 금액을 재차 확인하며 오늘의 할당된 목표량을 채워나가는 게 삶의 목적이라는 듯이.


현금박스를 누르면 탕하는 소리와 함께 동전들이 찰랑거리며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혜림은 동경의 시선으로 여주인장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출근하지 않는 날이면 혹시나 하고 그 주변을 서성이기도 했다. 하지만 남편 주인장은 그 자리를 쉽게 내주지 않았다. 아무래도 돈을 만지는 일을 알바생에게 맡기는 것은 꺼림칙히 여기는 듯했다. 그럼 그렇지. 복사하다 10원 한 푼도 날라갈까 봐 안달복달하는 그가 아닌가. 계산을 잘못해서 혹여나 돈을 내주는 착오는 결코 용납 못할 것이다. 차라리 자신이 하고 말겠다 하겠지.


드디어 고대했던 특별한 날이 찾아왔다! 손님이 정말 느닷없이 한꺼번에 몰려들었고, 여주인장은 급한 집안일 때문인지 나오질 못했다. 기회라 생각하고 당황한 점장을 돕고자 재빨리 계산대 안으로 쑥 들어가 옆에 미리 잘라둔 색색의 비닐 포장을 꺼내어 선물상자를 감쌌다. 그런데 포장지가 흐느적거리며 그대로 빠져나갈 기세로 손에서 미끄러졌다. 혜림의 심장도 조마조마해지기 시작했다. 주인장처럼 입을 앙 다물고 손톱의 날을 바짝 세워 다림질해서 상자 모서리에 맞댄 비닐 포장을 고정시키고 스카치테이프를 쭉쭉 붙여나갔다. 그런데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덕지덕지 투명 스카치테이프를 남발하지 않으려면 태이프의 크기 조절도 신경 써야 했는데 조급한 마음에 대문짝만 하게 붙여 버린 테이프의 흔적이 혜림의 마음을 영 찝찝하게 했다.


안쪽이 은색인 비닐포장지를 여러 겹으로 겹쳐 주름치마를 만들 듯 세련되게 포장하는 손놀림으로 주인장과 손님의 탄성을 자아내는 노련한 움직임은 혜림의 상상 속에서만 머물러야 했다. 현금 계산도 마찬가지였다. 그 단순한 덧셈, 뺄셈 계산을 맘 속으로 몇 번이나 검토해 보았는지. 다행히 신용카드를 내미는 고객은 없었지만 혹 신용카드를 받았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한 상황이었다. 단순변심으로 카드값을 취소하는 고객이 찾아온다면 그 또한 아찔해질 상황이었다. 하고 싶다고 호기심만 가지고서는 될 일이 아니었다. 입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며 심장이 쪼그라드는 상황을 마주하니 결국 수명이 단축되는 길로 자신을 몰아세운 꼴이 되고야 말았다. 복사기나 팩스의 사용법처럼 포장과 계산 또한 시간을 들여 꾸준히 익히고 연습해 보지 않는 한, 어깨너머로 조금 본 것과 현실의 간극은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의욕만 앞선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주인장이 내성적이긴 해도 용기를 갖고 뛰어드는 혜림의 작은 무모함을 발전적으로 키워줄 미래지향적 이가 아니라는 걸 단번에 깨닫고 난 이후 혜림은 본래의 자기 자리로 재빨리 돌아갔다. 먼지를 닦거나 복사기와 팩스기 앞에서 왱왱 돌며 기계처럼 움직이는 것을 반복하며.


" 께름칙하게 남은 부분이 있어."

" 뭔데, 엄마? "

" 팬시용품들을 들고 열심히 닦다가 머그컵 하나를 손에서 놓쳤어. 컵 아귀가 살짝 깨진 거야. 그런데 도저히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어. 눈치재치 못하게 서둘러 다른 물건으로 가려버렸지. "

" 나라도 그랬을 것 같아. 복사기나 팩스도 아니고, 머그컵인데. 가격도 비쌌을 거잖아. 인색하다며~~ "


" 내가 주인이라면 나도 나 같이 경험 없는 직원을 보면 냉정하게 대했을지도 몰라."

" 그래서 경력자를 우대하는 건가? "

" 그렇지. 수월하고, 경제적인 측면에서 그게 백 번 낫겠지. 쫓아내지 않는 것만도 다행인지 몰라. 그래도 사회경험이 없는 초년생에겐 뭔가는 배우고 남는 게 있으니까. 학원에 가도 비용은 내고 배우잖아? 아르바이트생은 공짜로 배우는 거지. 일하는 시간에. "

" 그렇게 생각하면 그 주인장도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은 거네. "

" 그렇네? 엄마가 어떤 기억을 부정적인 감정적으로만 포장해서 가슴속에 담아 버렸더니 다른 이면은 전혀 보지 못할 뻔했어. 엄마도 너랑 얘기하다 보니 삶이 재해석된다. 놀랍네~"


혜림은 보석을 발견한 듯 반짝거리는 눈으로 아들의 두 손을 잡았다. 어떤 기억이든 사실 모든 기억은 여러 가지 색깔을 담고 있다. 복사기 앞에서 능숙하고 노련하게 일을 실수 없이 처리했을 때 나 자신을 흡족하게 바라보았던 시간들도 분명 많지 않았었던가. 단지 우리의 본성이 부정적인 자극이나 감정을 더 확대해서 기억하거나 담아두려는 게 문제다. '좋은' 경험도 '나쁜' 경험도 이분법적 사고의 단정적 표현이고 이는 우리네 삶을 단편적으로 불행하게 몰아간다. 그래서 '경험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새로운 통찰로 이끌어주는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혜림은 생각했다.


" 엄마 다른 얘기도 해봐."

" 지금은 저녁밥 해야 해서 그렇고, 내일 학원 갔다 오면 또 얘기해 줄게."

" 아, 아쉽다. 재미있었는데... 엄마가 대학생이었을 때 모습을 생각하며 들으니까 신기해."

" 그래? 아들이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네. 고마워."


혜림은 아들을 살포시 안았다. J성향과 P성향의 아들의 거리가 좁혀지는 순간이었다. 17살의 아들이 23살의 엄마를 들여다보며 있는 그대로 공감을 해 주어서일까. 혜림은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오늘은 벌집 삼겹살로 돼지갈비 양념을 해서 아들의 입을 듬뿍 행복하게 해 주리리라. 혜림은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