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닝 글로리 (1)

문방구가 아니랍니다.

by 빛나는 숲 손호림

혜림은 집에 들어오는 길에 챙겨 왔던 교차로와 벼룩시장을 차례로 펼쳤다. 알바 구인란을 빠르게 스캔해서 나름 건전해 보이는 상호명부터 살폈다. 이름에서 안전한 장소라는 걸 확인해야 당혹스러운 일을 겪지 않을 거라는 마음이 드는 건 생존 본능이었다. 달랑 구인광고지만 보고 찾아갔다가 룸쌀롱 같은 유흥주점으로 잘못 팔려가는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지 말란 법은 없지 않은가.


아! 모닝 글로리다! 아침의 영광!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 옆에도 있었지. 지우개와 샤프, 젤러펜 말고도 아주 가끔씩은 팬시용품을 사러 가던 곳이긴 했다. 낡은 문구점들 사이에서 유독 문구계의 귀족인사마냥 깔끔하고 고급스런 이미지를 뿜뿜 풍기던 그곳. 마침 집에서도 20분 거리다. 혜림은 깊게 한 호흡을 가다듬고 나서 망설임 없이 전화번호를 꾹꾹 눌렀다.


" 여보세요? 알바생 구하죠? 방금 교차로 보고 연락드렸습니다."

" 네, 몇 살이죠? "

" 대학생이구요. 위치는 정확히 어디인가요? 이력서 준비해야 하는 거죠?"

" 모란역에서 7번 출구로 나오시면 바로 보여요. 일단, 오세요."


혜림은 이력서를 작성하지 않고 바로 와 달라는 주인의 말에 부랴부랴 옷을 다시 챙겨 입었다. 이력서라고 해 보았자 중, 고 졸업과 대학 재학이 전부다. 번거로운 절차가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얼굴만 보고 뽑겠다는 것은 주인의 뭔 자신감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간단히 면접만으로도 채용 가능하다는 말이니 최대한 단정하게 대학생 분위기를 한껏 장착하고 나가기로 했다. 그래봤자 청바지에 흰 면티가 다였지만. 그러나 청바지와 면티 하나만으로도 상큼 발랄한 이미지가 물씬 나타난다면 그 또한 대학생의 전형적인 이미지라 주인에게 신뢰감을 주리라.


***


얼굴을 마주한 문구점장은 깡마른 체구에 왜소했다. 얇은 금테 안경과 앙 다문 작은 입술이 한눈에 봐도 그의 까탈스러운 면모를 그대로 드러내 주었다. 매장 안 통로 사이엔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긴 생머리, 그것도 밝은 갈색머리의 검은 뿔테 안경을 장착한 여자가 서 있었다. 붉게 칠한 입술이 사뭇 도톰했지만 전혀 섹시하지 않은 그녀가 이곳의 안주인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부부는 살아가면서 닮지 않는다 했던가. 바로 이 부부를 두고 말하는 듯했다.


점장은 혜림을 위아래로 쑥 훑어보았다. 혹시나 이력서를 뒤늦게나마 써 달라고 할까 봐 혜림은 지갑에서 바로 학생증을 꺼내 보여 주었다. 이래 보여도 in-seoul이다! 그것도 성남 땅에서 자라,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서울대에서 가장 가까운 학교에 다니고 있단 말이다. 그러나 OO대학생임을 증명했음에도 어쩔 수 없이 차오르는 긴장감은 말할 것도 없고 물끄러미 응시하는 주인장의 따가운 시선에서 몸은 상명하복의 자세로 그대로 굳어 버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혜림은 그의 입술에서 삐져 나올 소리의 파장만을 기다렸다. 입이 바짝 말라 침을 꼴깍 삼키려는 찰나 무거운 공기가 드디어 갈라졌다.


" 내일부터 바로 일해요. 아침 10시에 와서 오후 3시까지. 손님이 찾으면 즉시 필요한 걸 내 줄 수 있도록 물건의 위치를 파악해 놓고. 먼지 수시로 닦고, 청소는 기본.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


그는 손가락으로 통창 옆, 한쪽 구석에 있는 복사기와 팩스를 손가락으로 넌지시 가리켰다.


" 이곳 주변은 죄다 사무실이예요. 그래서 사무용품을 찾거나 복사를 많이 하러 와. 앞 뒷면, 방향 잘 맞추어서 손님이 요구하는 대로 해 주면 돼요. 팩스도 여기 보면 보내는 방법 순서대로 적어 놓았으니 그대로 하면 돼요. 모르면 질문하고. 복사 한 장 잘못하면 몇 십원씩 그대로 날라간다는 것 기억하고.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면 안 되겠지요? 점심도 제공하니까 그렇게 알고요. 그럼 내일 봅시다. "


혜림은 절반으로 줄어든 그의 존대어를 인식하기도 전에 마음이 복잡해졌다. 복사와 팩스 보내기라니! 진열, 청소, 손님 대응, 포장, 계산까지는 예상했지만 나머진 전혀 예상 못한 터였다. 서둘러 다가가 슬쩍 훑어본 복사기의 여러 장치와 버튼을 보는 순간 머리가 핑그르르 돌았다. 팩스는 또 웬 말이냐. 이건 사무실 말단 직원이 하는 일 아닌가? 여긴 말 그대로, 팬시문구점인데? 아냐! 아냐! 미리 겁먹지 말라고! 가르쳐 주신다고 했잖아. 그런데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하면 어떡하지? 아..., 펜만 쓰는 공부머리와 기기 다루는 능력은 전혀 다른 영역이란 말이야...


이내 걱정 한 보따리가 날아와서 가슴에 꼭 박힌 채 도통 나가려 하질 않았다. 근심한다고 뭐가 달라질 것도 없었지만 이는 혜림의 불안증세와 완벽주의 성향이 가파르게 합쳐질 때에 뭐든 잘 해내기 위해 머리부터 계속 굴려대는 그녀만의 씨름 방식이기도 했다. 이제 곧 4학년이다. 졸업하기 전에 커피와 과자 사 먹을 용돈은 사치라고 해도, 고시원비랑, 밥값, 등록금은 벌어놓아야 한다. 다행히 전 학기에 성적 장학금을 받아 휴학을 한 상태이긴 했지만, 4학년 2학기 등록금은 확신할 수가 없다. 혜성같이 나타난 요상한 후배 여자애가 그녀의 앞길에 바위를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 민낯에 늘 생활한복을 입고 다니며 수도승 같은 분위기로 묘한 분위기를 풍기던 그 애는 혜림의 장학금을 가로채려는 마지막 신호를 보내듯 그녀의 뒤를 바짝 쫓아오고 있었다. 혜림의 입에선 폭삭 늙은 노인마냥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인생은 늘 어찌 이리 막막한 코너길로 나를 계속 내미는지. 그러나 마음 한 켠에서 사회인으로 발을 딛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한다고 생각했었던 알바 세계의 첫 입문에 들어섰다는 기대 한 스푼과 낯섬의 장면들이 가져다줄 당황과 도전 앞에 혜림 자신이 어떻게 반응하고 적응할지 한껏 궁금하다는 목소리도 들려왔다. 그렇다면 막연한 두려움보다는 앞으로 펼쳐질 상황들 속에서 때때마다 마주하는 문제에 용기있게 직면하여 정신을 바짝 차리고 침착하게 따라가 보아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래, 우선 가 보는 거야! 겁내지 말자고! 혜림은 두 손을 불끈 움켜쥔 채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파란 하늘에 걸친 하얀 구름이 눈앞에 선명하게 보였다. 딱딱해진 혜림의 마음도 다시 몽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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