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살 여대생으로
혜림은 아들의 빈 방을 멍하니 바라보다 불현듯 답답해졌다. 널브러진 옷가지와 이불, 손톱깎이, 빈 과자 봉지와 음료수 병들이 여기저기 방치된 침대와 책상이 몹시 거슬리고 불편했다. 어차피 방안을 깔끔히 정리해 주어도 그녀의 오랜 바람에 전혀 개의치 않을 아들이다. 혜림은 그 옛날 자신처럼, 정돈된 책상 위에서 가지런히 놓인 책과 문제집을 꺼내 반듯하게 공부하는 아들이 눈앞에 나타날 때가 꼭 올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희망을 놓지 않는 한 반드시 이루게 되었던 수많은 경험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혜림 자신의 희망을 겹쳐놓았을 뿐이지 아들의 성향은 아니었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아들의 인기척이 느껴지는 찰나 현관문이 "쾅!"하고 닫혔다. 그 기세가 스트레스가 만땅으로 채워졌음이 분명했다. 혜림의 남편처럼 그의 아들도 바깥에서 쓸어온 질척질척한 감정을 모두 던져 버리고 들어왔으면 좋으련만 시큼하고 꾸덕꾸덕한 땀냄새에는 온갖 짜증이 묻어 있었다. 혜림의 아들은 당신이 내 감정의 쓰레기통이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듯 곧바로 푸념섞인 말을 쏟아부었다.
" 으~~~~, 하기 싫다~~~~. 수학문제는 점점 더 미궁으로 빠지네? 도대체 왜 이걸 풀어야 하는 거야? 나중에 써 먹을 수는 있기나 한 거야? 지금 선생님은 도형 영역에선 일단 공식부터 외우래. 무조건 풀라는 거야. 말이 돼? 원리를 먼저 깨우치는 게 순서 아냐? 왜 그래야 하는데? 아~~~~~, 형처럼 나도 빨리 취업하고 싶다. 엄마, 나 알바하면 안 돼? 내 친구는 벌써부터 주말에 알바 뛴대. 편의점에서. 나도 용돈 벌어 내가 지난번에 봐 둔 청자켓 옷 사고 싶어! "
혜림은 기다렸다는 듯이 아들의 말에 바로 대응했다.
" 알바가 쉬운 줄 알아? 지금은 공부할 때잖아. 네 친구가 주말에 편의점 알바 한다는 건, 공부를 벌써 내려놓았다는 거네. 주중에 영, 수하고 주말에 나머지 교과 공부 안 하면 어떻게 대학 갈 건데? 대학 가서 알바해. 대학 가면 알바 할 여유 많아. 하지 말라고 해도 하게 할 거야. 물론 엄마 때처럼 네가 절박해서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
" 절박하다니? "
아들은 생소한 단어를 만난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 넌 모르겠지. '절박하다'는 것이 뭔지나 알까? '사면초가'라고 들어봤지? 절벽 위 낭떠러지를 앞에 두고 숫기 없는 내가 세상에 갑자기 몸을 밀어 넣어야 했던 기분을. 후~ 그땐 그랬지. 하~ 아들 덕분에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네. 넌 지금 좀 힘들다고 잠시 낭만적인 감정으로 단순히 내뱉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엄마에겐 그건 사치스런 감정에 불과했어. "
혜림은 아들과 마주 보고 있었지만 서로 다른 우주에서 서로 다른 별고 보고 있음을 인식했다. 그 옛날 내 어머니에게 느꼈던 고리타분함을 이 아이도 지금 나를 보며 생각하겠지.
" 뭐야... 그게 뭔데? "
" 글쎄, 어디서부터 얘기해 줘야 할까? 듣고는 싶어? 엄마는 아르바이트는 과외 빼고 딱 4가지 해 보았어. 칼국수 집, 일식집, 문구점에서, 마지막은... 축협에서. 하~ 축협이라니. 대학 3학년 마치고 휴학해서 고시원 들어가기 전에 학원비와 생활비가 필요했거든. 엄마 소원이 뭔지 알아? 제발 돈, 걱, 정, 안, 하, 고, 오, 로, 지, 공, 부, 만, 해, 보, 는 거!"
혜림의 아들은 엄마의 딱딱 끊어지는 사이사이의 간절한 호흡에 갑자기 비집고 들어가서 그녀의 울타리가 되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몰랐던 엄마의 세계가 자못 궁금해졌다. 평소와 달리 "라떼는 말이야"로 들리지 않는 게 이유이기도 했다.
"너넨 말이야. 절박감이 없어. 가진 게 넘 많아. 풍요롭게 자란 세대는 모르지. 엄마는 나의 어린 시절 결핍을 네게 채워주면 네가 공부를 엄청 열심히 할 줄 알았어. 지금처럼 한창 공부할 나이에 알바하겠다는 생각? 행복한 고민이야. 난 도통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는데... 아무리 공부해도 늘 공부하는 시간이 부족했으니까. 알바? 사실, 인생에 정말 필요한 경험이지! 하지만 가볍게 심심풀이로 용돈이나 좀 벌아보겠다는 마음으로 하는 알바랑 과거 엄마의 알바 경험은 비교할 수 없어. 아... "
" 엄마, 더 이상 끌지 말고 얘기해 봐. 도대체 어땠는데? "
" 그래? 그럼 엄마가 얘기해 줄게. 가장 신나고 달콤했던 알바는 다행히 마지막 알바니, 들을수록 점점 재민 있을 거야. 그러고 보니 언젠가 실전에 뛰어들기 전, 알바생이 갖추어야 할 마인드 세팅에 미리 입문하는 거네? 무턱대고 친구 따라 생각 없이 알바 시작했다 큰 코 다칠 수 있어. 세상이 그렇게 만만치 않거든~~~~~. "
" 알았어. 엄마. 얘기해 봐요 "
" 후~~~ 그래, 그럼 우선 아들이 타 주는 아메리카노 한 잔 먹을 수 있을까? 공짜론 안 되지~~~. 방학이라 이럴 얘기할 여유도 있고. 넘 좋다~~~~~. "
아들은 카누 한 포를 꺼내 컵에 붓고 정수기의 온수 물을 커피 온도에 맞추어 물을 내렸다. 엄마의 표정은 어느새 타임머신을 타고 23살의 앳된 여대생으로 돌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