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1개월 아이들을 살짝 혼내고 나서 쓰는 반성문이다.
나는 좋은 부모가 되지 못할 것 같아, 하며 아이를 낳기로 결정한 사람은 없겠지만 막상 아이라는 존재를 키우다 보면 내가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은 때때로 찾아오는 것 같다. 사실 나도 내가 만 2세도 되지 않은 아이에게 내 감정조절에 실패해 화를 내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아이들은 끊임없이 요구하는 존재다. 그게 신생아가 되었건 돌이 지난 토들러가 되었건 마찬가지다. 신생아 때는 정말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을 부모가 다 해결해 줘야만 한다. 지금도 하나부터 열까지 부모의 손길이 필요한 건 마찬가지지만, 돌 전까지 아이의 입장에서 부모는 정말 절실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직립 보행 전 보호자의 역할은 그만큼이나 크다.
걸음마가 시작되고 아이들이 정말 훌쩍 큰다는 느낌이 드는 건 말을 시작하면서부터다. 신체적으로 손도 발도 키도 훌쩍 커버린 느낌도 있지만, 엄마가 하는 말을 어느 정도 알아듣고 대답하고, 자기 의견을 내비친다. 조부모와 함께 지내고 있는 우리 아이들은 ‘엄마, 아빠, 언니, 함미, 할비’라는 말을 제일 자주 하고, ‘가, 와, 네, 응’ 등의 한 글자 단어 말하기를 좋아한다. ‘꼭꼭, 빠빠, 째째’와 같은 된소리 발음도 곧잘 하더니 요즘은 ‘아니야, 아이패(드), 앙대, 아추, 아뜨’와 같은 ‘아’로 시작하는 말들을 자주 하는 편이다.
이렇게 의사소통이 얼추 되어감에도 불구하고 육아의 허들은 늘 찾아온다. 바로 재접근기라는 관문인데, 정의상으로는 16~24개월 경으로 (엄마를 좀 덜 찾고) 세상을 탐색하던 아이가 다시금 엄마로부터의 위로와 애정을 필요로 하는 시기를 일컫는다. 다시 말해 또다시 엄마 껌딱지가 된다는 뜻이다. 사실 쌍둥이 육아는 안 힘들었던 적이 없지만, 18개월 즈음 아이들이 둘 다 장염과 감기로 고생하던 시기가 가장 힘들었던 것 같다. 아프면 아이들은 일차적으로 엄마 곁에 있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엄마 곁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그런 아이가 둘이다. 후우.. 이 글을 쓰면서도 그때의 힘들었던 기억이 선명하다. 3개월이 지났지만 새벽에 미치도록 힘들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지나서 다행이란 생각뿐이다.
사실 오늘도 아이들이 목감기가 진행 중이라 병원에 다녀왔다. 둘째의 증상이 더 진행 중이기도 했고, 오전에 콧물까지 흘러 불편해하는 기색을 비춰 바로 병원행을 했다. 이제 쌍둥이 두 딸을 데리고 혼자 병원에 가는 것쯤은 익숙해진 일이어서 첫째의 칭얼거림과 연이은 둘째의 칭얼거림을 무사히 달래 병원 진료에 약국까지 가는 건 어느 정도 베테랑이다. 병원 갔다가 바로 또 둘을 데리고 놀이터에서 1시간 정도 놀다 올 여유도 생겼다.
내 기준으로 오늘은 병원에서도 크게, 오래 울지 않고 잘 있어 주었고, 놀이터에서 정말 신나게 잘 놀고, 낮잠까지 크게 힘들이지 않고 재워서 2시간 반을 잔 덕분에 육아가 고되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오늘 정도의 육체적 힘듦은 내가 기관없이 하는 21개월 쌍둥이 육아를 잘 버텨주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밤에 둘을 목욕까지 시키고 나니 살짝 힘들어서 좀 혼자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방으로 피신해 혼자만의 무념무상 시간을 보내는 데 둘째가 또 어떻게 알고 방문을 빼꼼 열고 들어왔다. 후우.. 아무리 예쁜 딸이어도 내 몸이 힘드니 좀 나가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제 아이들이 키가 제법 커서 어느 방문이든 다 열고 닫는다.) 근데 엄마의 이런 마음도 모르고 둘째는 안아 올려라 칭얼칭얼 짜증스러운 울음을 시작했다. 아직도 애 우는 소리에 취약한 3년 차 엄마는 이때부터 좀 감정조절에 실패한 것 같다.
둘째의 울음소리로 촉발된 내 짜증은 유튜브를 보고 있는 첫째의 휴대폰을 뺏으며 첫째의 땡깡으로 번졌고 집안은 순식간에 두 아이의 울음소리로 아비규환이 되었다. 벗어나고 싶었다. 잠시라도.
내 기분이 너무 엉망이고 내 몸 컨디션이 엉망이라 아이들을 달랠 여력이 없다... 고 생각하고 그대로 방으로 들어갔다. 제발 그대로 스스로 멈춰주길 바랬... 지만, 당연하게도 친정 엄마가 달래서 울음을 그쳐주셨다. 친정 엄마랑 쌍둥이를 키우며 이따금 있는 상황이다.
나는 자책했다.
엄마의 비일관적인 양육 태도가 아이들에게 가장 좋지 못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낮에 놀 때는 정말 열과 성을 다해 꺄르르 웃게 하고 혼자쌍둥이 둘을 데리고 외출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러다 내가 제풀에 지쳐 정말 힘든 날은 꼭 그 화살이 아이들에게 돌아간다. 21개월 아이들에게 향한다. 내가 좋은 양육자가 되지 못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이럴 때는 일단 생각을 멈추고 아이들에게 사과를 한다. 이미 뱉어버린 말과 태도를 돌이킬 수 없다. 아이들의 기억에 저장되었다는 죄책감이 나를 사로잡지 않게 한 명 한 명에게 사과를 한다. 지켜지지 못할 고해성사처럼이 아닌, 진심 어린 사과를 한다.
먼저 둘째 때문에 화가 나 버려 첫째에게까지 큰소리를 쳤으므로 첫째에게 먼저 사과를 했다.
“수빈아, 아까 엄마가 씩씩 씩씩 화를 냈지?”
아이가 양쪽 검지손으로 빌런 흉내를 내며 내가 화를 냈었다고 대답한다.
“엄마가 화내서 무서웠어?”
아이는 “응” 하고 대답한다.
“엄마가 미안해~ 잘못했어. 엄마가 잘못한 거야. 엄마 이제 화내지 말까?”
아이는 고개를 젓는다.
아직 내가 하는 말을 100% 이해하지는 못하는 21개월 아기들이다. 내가 21개월 아기들에게 왜 큰소리를 쳤을까, 후회하며 결국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둘째는 내가 화를 내면 뿌엥~ 하고 울다가도 또 내가 직접 달래주면 내 옆에 와서 배시시 애교를 부리고 잘 때도 꼭 내 옆에 꼭 붙어서 자려고 한다. 엄마의 애정을 갈구하는 새끼 강아지들 같다. 바라보면 너무 귀여운데 징징대면 너무 힘들다. 둘이서 나를 차지하려고 목청 놓아 울 땐 ‘아, 내가 이 둘의 엄마지’, ‘내가 뭐라고 나한테만 이럴까.’ 하는 양가적인 마음이 늘 상충한다. 이럴 땐 또 멀리 떨어져 함께 육아하지 못하는 남편이 욕받이다. 물론 속으로 구시렁대는 거지만, 이따금 원망과 미움과 아쉬움이라는 감정이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부모가 자식의 거울이라는 말은 나를 종종 뜨끔하게 한다.
아직 아이라고, 잘 모른다고 생각해서 했던 말과 행동들을 되돌아보게 한다. 결국 오늘 나의 행동을 반성하게 된다. 그런 마음을 담아 오늘 일기를 쓴다.
먼 훗날, 내가 엄마라서 다행이었다고 해주면 좋겠다. 앞으로 새로운 거울을 많이 많이 만들어야겠다는 마음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