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삶의 어느 순간, 우리는 커다란 벽 앞에 멈춰설 때가 있다. 두려움으로, 기피로, 때론 익숙함에 순응하는 순간 드러나는 벽. 그리고 그 앞에서 발길을 돌리거나 외면하는 초라한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1996년의 가을, 나는 그 하나의 벽과 마주쳤다.
1996년 여름, 한국 대학생 총연합 행사에 경찰이 투입돼 캠퍼스가 봉쇄되었던 '한총련 사태'가 끝이 났다. 교문은 뜯겨나갔고 끝까지 대치하던 인문관 건물은 흉한 모습을 드러냈지만 가을 학기는 그대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신촌역에서 학교로 이어지는 길목에는 수십 명의 전경들이 길을 지키고 서 있었다. '화이바'를 쓰고 곤봉과 방패를 든 전경들은 침묵 속에서 길게 늘어서 있었다. 그들이 쥔 방패와 내 어깨가 스칠 듯 아슬아슬한, 한두 사람만이 겨우 지날 수 있는 좁은 통로. 그곳에서 그들은 불쑥 팔을 뻗어 길을 막고 학생증을 요구했다. 경찰은 수상한 자를 세워 질문하고 신분증을 요구할 수 있었지만 무작위로 불심 검문을 하는 것은 불법이었다. 하지만 당시 이런 상식은 통하지 않았다. 10미터 남짓, 무장한 전경들 사이를 지나가는 기분은 골목에서 건달 옆을 지나는 초등학생과 다를 바 없었다. 남학생들은 예외 없이 신분증을 내야 했다. 수업시간이 빠듯하다든가, 다투기 귀찮아서, 어쨌든 경찰이니까 등등 우리들은 속으로 궁색한 변명들을 떠올리며 순순히 학생증을 보여주고 가방까지 열어 보인 뒤에야 종종걸음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내 안에 자리잡은 ‘경계'를 느낄 수 있었다. 매일 아침 전경들의 불심검문은 단지 등굣길의 작은 불편함일 수 있었지만 그것은 내 안에 두려움과 무력감의 확실한 실체를 느끼게 했다. 그것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짙어지고 높아졌고, 그럴수록 나는 설명할 수 없는 비현실감을 느꼈다. 하루 아침에 내 주위에 벽이 둘러쳐진 것처럼 숨이 막혔고, 식당, 강의실, 내가 가는 곳 어디에서도 그 벽은 느껴졌다. 그것은 내가 외면하면 할수록, 너도 그럴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걸 인정하라는 듯, 비웃으며 머릿속을 맴돌았다. 학교 친구들이나 교수님들은 지금의 상황을 마치 없는 일인 것처럼 행동했고 그 태연한 일상 속에서 함께하는 내가 수치스러웠다. 내게 학생증은 더 이상 명예, 진리, 자유 같은 가치들을 표상하지 못하는, 그저 비굴한 플라스틱 통행증에 불과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등굣길에 학생증 제시를 거부했다. 전경들은 빠르게 내 앞을 막아섰고, 어깨를 맞대고 에워쌌다. "당신의 관등성명과 군번을 말해라. 그러면 나도 학생증을 보여주겠다." 나는 학생회 유인물에서 본 문장을 그대로 읊었지만, 이 방법이 통할지는 알 수 없었다. 전경들은 말없이 길을 막았다. 이러다 끌려가는 건 아닐까. 그냥 보여주는 것이 어떨까. 수만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동안, 시간은 흐르지 않고 내 위에서 나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뒤에선 왜 빨리 가지 않느냐는 듯 학생들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그렇게 몇 분의 시간이 지났다. “야 됐으니까, 보내라"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고 전경들 사이로 스르르 길이 열렸다. 두근대는 심장 소리를 숨긴 채 나는 천천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발걸음이 멀어질수록, 안도와 함께 씁쓸함이 번졌다. 그날 나는 내 안의 낯선 벽 앞에서 작은 저항을 시도했던 것 같다. 방패의 줄이 아니라 내 안의 두려움과 외면을 향해.
우리는 주위에서 다양한 경계를 만난다. 우리가 스스로를 가두는 경계, 이방인을 구분 짓는 낙인, 원치 않는 것을 가리는 장막이기도 하다. 제대로 바라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지만, 우리를 가르고 가두는 벽은 분명 존재한다. 그 벽은 현실이 아니라, 우리가 믿어버린 허구의 윤곽이며, 외면해 온 세상의 균열일지도 모른다. 이 글들은 내가 ‘경계’ 앞에서 머뭇거리며 내다본, 또 다른 세계의 조각들이다. 이 책에 담긴 글들은 어쩌면 산만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이 조각들을 꿰는 하나의 질문은 분명하다. 당신과 나, 우리를 가두고 가르는 ‘경계’는 무엇인가. 안과 밖, 과거와 현재, 나와 세계, 기술과 인간, 시민과 권력. 우리가 선 모든 곳은 경계의 위다. 이 글을 길잡이 삼아, 당신의 일상을 가두는 익숙한 벽은 무엇인지, 외면해 온 세상의 균열은 어디에 있는지 함께 발견하고 그 너머를 상상할 수 있기를. 경계를 마주할 용기와 낯섬을 이해하려는 감각이 있다면, 이 이야기들은 곧 당신의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