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년 봄의 기억

노수석 군을 추모하며

by 김정민

1996년 3월 29일. 같은 학교, 같은 학번이었던 한 법대생이 시위 도중 사망했다. 부검 결과는 급성 심장마비. 스무 살의 건강한 청년이, 외부 충격 없이 심장이 멈췄다는 것이었다. 곧 전국의 대학가는 분노로 들끓었다.


그가 참여한 집회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영삼의 대선자금 공개와 국가 교육재정 확보를 요구하는 자리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왜 그런 요구에 학생과 경찰이 충돌했는지 의문일 수 있지만, 당시엔 대규모 학생 집회가 열린다는 것만으로 최루탄과 몽둥이, 백골단의 투입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날은 서울지역 대학생 총연합의 대규모 집회였다. 학교 앞에서 시작된 시위는 종로로 이어졌고, 그는 을지로 어딘가 주검으로 발견됐다.


한 대학생의 죽음을 두고 기성 미디어와 학생회 전단 속 시각은 달랐고, 사실과 진실의 사이에서 우리는 혼란스러웠다. 며칠이 흐르고 4월 초 학교에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대규모 집회가 예고됐다. 그날 아침, 1교시 전공수업에 맞춰 도착한 캠퍼스 안은 전국에서 모인 대학생들과 깃발들로 가득했다. 그제야 예고된 집회 날이란 걸 깨달었지만, 나는 강의실로 향했다. 강의실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학생들로 가득했다. 출석을 부르는 동안에도 강의실 창밖에서는 간간히 함성이 들렸지만 교수님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수업을 시작했다. 그의 차분한 목소리는 강의실안에 어떤 비현실감을 만들었다. 전자기학 공식으로 금세 가득 찬 칠판은 지식의 권위로 우리를 ‘안’에서 안도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이상했다. 같은 학교 학생이 의문의 죽음을 맞았고, 수백 명의 타교 학생들이 교문 앞에 모여 있었는데, 우리의 시간은 아무 일 없다는 듯 흘러가고 있었다. 연강 중 1교시가 끝났지만 소개팅이며 숙제 이야기뿐, 과 친구들 아무도 강의실 바깥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 선택적인 침묵은 마치 암묵적인 약속처럼 느껴졌다. 바깥의 일은 우리와 상관없는 일이며, 각자의 학점과 미래가 더 중요하다는 무언의 약속. 그리고 나 역시 그 약속의 충실한 일부였다. 곧이어 이어진 수업은 더 이상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정체를 알 수 없는 열패감과 수치심이 차올랐다. 죽어간 학우를 외면하고 태연하게 앉아있는 이 공간, 그리고 그 일부인 나 자신이 견딜 수 없이 부끄러웠다. 나도 그 순간까지 이들 중 한 명이었지만, 더 이상 그 강의실에 함께 있을 수가 없었다. 그 과목은 2 학년 전공 필수였고, 교수님이 학과장이라는 사실은 나의 마음을 잠시 괴롭혔지만, 나는 결국 가방을 들고 강의실 뒷문으로 나왔다. 이 침묵의 공모자가 되느니, 차라리 낙오자가 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의 망설임은 수치일 뿐이었다. 그리고 죽은 학우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함성을 향해 건물을 나섰다.


햇볕이 쨍한 날이었다. 깃발들이 서로 부딪히며 바람에 펄럭였고, 확성기 소리가 교정 어딘가 메아리 쳤다. 학교 중앙 도로는 전국에서 모인 학생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들은 지난 밤을 교내에서 지샌듯 했다. 나는 수많은 깃발 사이에서 내 동아리의 깃발을 찾았고, 그 밑에서 선배 몇 명을 발견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다른 깃발들과 어깨를 맞대고 학교 밖으로 나섰다.


나는 그 학기 우리 과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죽은 학우를 외면한 채 아무 일 없다는 듯 강의실로 돌아가고, 웃고 떠들며 일상을 이어가는 그 공기 속으로는 다시 발을 들일 수 없었다. 강의실 ‘안’을 나와 함성이 들려오는 '밖'을 선택했던 그 순간. 그 선택부터 우리는 다르게 흐르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살아있던 나의 스무 살 봄은, 그렇게 기억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