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형에 대한 때늦은 변명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 나를 내심 비웃던 선배가 있었다. 90년대 초, 「상실의 시대」는 전국의 서점을 휩쓸었고, 신선한 문체와 상실의 정서가 젊은 세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특정 작가의 문학이 대 유행하는 현상은 곧 비판을 불렀다. 쉽고 빠르게 읽히는 문학, 감성적 소비에 적합한 문학, 여성을 대상화하는 문학. 내가 하루키의 책을 읽는다고 했을 때, 선배는 ‘너도 그 부류구나’라는 표정으로 나를 씁쓸하게 바라봤다. 나에게도 억울한 면이 없지 않았다. 하루키의 소설을 처음 접한 건 유행이 좀 지났을 때였고, 또 「상실의 시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군에서 자대에 배치된 후 며칠의 대기 기간 동안, 독서실에 있던 「태엽 감는 새 연대기」를 우연히 읽게 됐다.
「태엽 감는 새」 에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아내가 사라진 후 주인공이 신비로운 경험을 하며 아내를 찾아가는 여정이 그려진다. 그 과정에서 우물이라는 무의식의 매개를 통해 주인공의 어둠과 상실을 보여주는 동시에, 만주에서 벌어진 일제의 폭력이라는 일본 근대사의 어두움을 끌어온다. 하루키의 소설은 단번에 나를 사로잡았다. 무엇보다 건조하지만 매끄러운 문체와 더불어 그 시기의 내 상황과 겹쳐지며 공감이 컸는데, 입대 후에도 '사회 때'를 벗지 못했던 나는 하루키의 주인공들에게 끌렸다.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한 채 경계에 머무는 사람들. 상실을 겪고, 서서히 평범한 세계에서 멀어지는 사람들. 그들에게서 친근함을 느낀 것은 내 안의 경계에 대한 자각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이후로 그의 초기 단편부터 최신작까지 섭렵했다. 특히 난 그의 초기 단편들을 좋아하는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단편은 「치즈케이크 모양을 한 나의 가난」 이다. 주인공과 그의 아내가 마련한 신혼집이 기차선로가 교차하는 곳에 세워진 치즈케이크 모양의 좁은 집이었다는 단순한 설정인데, 제목부터 재치가 있는 데다 전체 톤이 밝았기 때문에 가볍게 읽을 수 있었다. 젊은 신혼부부의 가난을 치즈케이크 모양처럼 조금은 유쾌하고 약간은 이상하게 생긴 기억으로 형상화한 것. 그것이 하루키의 매력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하루키는 꾸준히 신작을 내놓았고, 출간하자마자 달려가 읽곤 했다. 어느 순간부터 초기의 재치 있던 문장은 희미해지고 이야기의 호흡은 다소 장황해졌지만 하루키는 여전히 나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네 형’ 같은 존재였다. 어떤 날은 재미없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모른 척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하루키가 노벨 문학상 수상 후보로 언급된다는 소식을 들을 때면, 과연 그럴 만 한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는 일본 사회와 역사 속 ‘폭력’을 다양한 방식으로 다뤄왔지만, 그 문장들이 세상을 움직일 만큼 단호했거나 선명했는지는 의문이다. 「태엽 감는 새 연대기」에서 그는 근대사에서 일본이 저지른 폭력을 언급하고 그 유산이 아직 남아있음을 꼬집었지만, 그 폭력은 문학적 상징으로만 처리되고 ‘일본은 무엇을 반성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끝내 피한다. 그는 거대한 폭력과 역사의 상처를 개인의 무의식과 기묘한 판타지로 치환했고, 독자는 역사의 무게를 직접 마주하기보다, 한 개인의 신비로운 모험담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하루키 문학이 가진 흡인력이었고, 동시에 그가 결코 넘을 수 없는 명백한 한계였다. 그는 글을 통해 뚜렷한 전선(戰線)을 긋는 작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나에게 하루키는, 말 잘하고 친근한 동네 형에 더 가깝다. 옆에 앉아 귀를 기울이면, 쓸쓸하고 변변치 않은 인물이 어느새 모험을 시작한다. 그리고 나는 그가 명확한 전선(戰線)은 아니었을지라도 늘 경계를 의식하고 조준해 왔다고 생각한다. 세상의 끝, 낮과 밤,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환상의 경계 앞에서 "아무렴 어때." 하며 건너가는 하루키의 주인공들. 그들이 잃어버린 아내나 고양이를 찾는 여정은, 표면적으로는 사소해 보이지만 실은 사회의 폭력과 상실의 실체를 확인하고 그것을 정면으로 돌파하려는 현대의 우화(寓話)에 가깝다. 하루키는 '이렇게 싸워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 대신, 우리 각자의 깊은 '우물'로 내려가야 함을, 즉 자기 안의 어둠과 먼저 대면해야 함을 끈질기게 보여준다. 이것이야 말로 하루키가 길 잃은 경계인들에게 제시하는, 가장 우회적이면서도 가장 단호한 이정표일 것이다.
하루키는 심오한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작가도, 본격적으로 사회문제를 고발하는 작가도 아니지만, 공백과 경계에 대한 그만의 감성으로 우리를 높은 담장 밖의 모험으로 끌어낸다. 이 시대의 '경계인'에게 보내는 가장 따뜻한 긍정이자, 가장 끈질긴 위로. 그것이, 내가 아는 하루키 문학이고 여전히 하루키형을 좋아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