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감옥

처음이자 마지막 연출의 추억

by 김정민

98년에 난 대학교 4학년이었고, 군입대도 미룬 채 동아리 정기공연 연출을 맡고 있었다. 처음부터 연출을 할 생각은 없었지만, 일단 공연을 고민하다 보니 혼자 대본을 쓰고 있었고, 아무도 대본에 관심이 없다 보니 결국 연출까지 맡게 되었다.


내가 입학했을 때는 이미 X세대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었다. 서태지의 음악을 시작으로 다양한 장르의 새로운 사운드가 거리의 ‘구르마’에서 흘러나왔고, ‘민중가요’를 부르는 노래 동아리의 위상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동아리방을 찾는 신입생은 점점 줄어들었고, 기웃거리던 신입생들도 ‘우울하고 생경한’ 노래를 부르는 우리를 보고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새로운 문화의 물결은 ‘집단적 저항’보다는 ‘개인의 해방’과 ‘새로움’을 좇았고, 노래패의 낡은 의상은 그들에게 시대착오적인 과거처럼 낯설게 느껴졌을 것이다.


IMF 사태 이전까지 서울 대학가의 거리는 뭔가 태동하는 듯 흥청거리고 부글거렸다. ‘과외’나 다른 아르바이트로 비교적 쉽게 돈을 벌 수 있었고 대학생들은 소비의 주체가 되어 브랜드 제품을 사고 문화를 소비하기 시작했다. 노동운동에서 멀어진 학생운동은 등록금 인상이나 총장 선출 같은 이슈에 불을 붙이려 했지만, 그보다 더 강력한 미디어와 대중문화가 우리를 이끌었다. 우리는 공강이면 카페나 PC 방, 비디오방, 당구장으로 달려가기 바빴다.


그리고 97년, IMF 사태가 터졌다. 우울한 뉴스들이 TV 와 신문을 도배했고, 급기야 학교를 그만두는 친구들까지 생겨났다. 그건 흡사 코로나 같은 전염병이었다. 누군가 자살했다는 뉴스들과 함께 내 삶이 언제 무너질지 모를 경제 위기는 숨 쉬는 것조차 어렵게 들었다. 어떤 친구는 도서관에 틀어박혔고, 누구는 휴학을 하거나, 군대를 택했다.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미래 앞에서, 우리는 제각기 흩어지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98년 가을이 왔다. 고민도 있었지만 우리는 공연을 올리기로 결정했다. 기말고사 일정을 고려하면 공연일까지는 한 달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 결심은 무엇을 전달하겠다는 명확한 기획보다, 그저 함께 무대에 서고 싶다는 간절함에 가까웠다. IMF 가 무너뜨린 건 은행만이 아니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했던 연결이 무너지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묻기 시작했다.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

그때 내가 처음 떠올린 단어는 ‘감옥’이었다. 그건 나의 마음이자, 당시 모두의 정서였을 것이다. 나는 이 막막함을 무대 위에 올리고 싶었다. 우리 안에 존재하는 감옥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나는 메인 테마 곡의 제목도 ‘감옥’으로 정하고, 작곡을 시작했다.


나를 가둔 건 무엇일까 이 어둡고 차가운 감옥 / 어디에도 빛은 없고 서로의 숨소리만 들려 … 내게 잘못이 있다면 누구보다 강한 열정뿐 / 내게 잘못이 있다면 닫힌 도시 너머를 꿈꾸었을 뿐… - 노래 ‘감옥’


작곡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마이너 키에 강한 비트를 넣었는 데다, 이미 가사에서 풍기는 ‘민중가요’의 냄새를 벗어날 수 없었다. 주변에선 키득거렸지만, 나는 오히려 이 노래가 이 시대에 필요한 '직설적인 외침'이라고 생각했고 결과적으로 공연에 무게를 더했다(고 믿는다.)


공연은 순수 창작곡으로 채우기로 했지만,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총 8 곡 중 기존에 있던 한두 곡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선후배들에게 작곡을 분담시켰고. 곡이 나오면 바로 연주와 노래 연습에 들어갔다. 팔짱을 끼고 바라보던 복학생 형들도 하나 둘 조명을 맡거나 무대를 만들기 시작했다.


공연의 내용은 다락방에 갇힌 소녀의 이야기였다. 무대에서 다락방은 물리적으로 설치되었지만, 실제는 그녀의 의식이었다. 그녀의 의식 안에는 ‘집념’, ‘자유’, ‘영원’, ‘희망’ 같은 의지들이 갇혀 있었는데, 왜 소녀의 의식 저편에 갇히게 되었는지는 공연 안에서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당시는 ‘구조조정’, ‘세계화’, ‘신자유주의’ 같은 단어들이 우리의 눈과 귀를 짓누르기 시작하던 때였다. 나는 거대한 경제 논리와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자율성과 가치를 억누르는 것이 폭력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에 의해 잠식당하고 소외되고 있는 우리 안의 소중한 가치들에 대해 공연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리고 공연의 마지막 노래의 제목은 ‘시를 써볼까’였다. 그건 당시 내가 어렵게 꺼낸 대안이었다. 98년의 우리는 스스로의 검열과 불안 속에 갇혀 있었다. 무언가를 거절할 수 있는 힘조차 점점 사라져 가던 시절, 그때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던 유일한 선택은, 사회가 통제하는 논리와 질서의 그물을 넘는 언어 – ‘시’였다. 시를 쓴다는 건, 말해지지 않는 것을 말하는 연습, 어디에도 닿지 않을 말을 끝까지 써보는 일이었다. 그건 제도 안의 언어로 감옥의 벽을 두드리는 것이 아니라, 질서 너머의 언어로 질서의 경계를 건너는 방법이었다.


지금 와 돌이켜보면, 98년의 내가 말하고 싶었던 우리 안의 '감옥'은 지금의 내가 온몸으로 느끼는 '경계'의 감성과 맞닿아 있었다. 당시에는 어렴풋이 느꼈을 뿐이지만, 나를 가두는 보이지 않는 질서에 맞서는 방법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았다. 그것은 바로 경계 너머를 상상하는 적극적인 시선, 그리고 그 시선을 담아내는 글쓰기였다. 스무 해가 훌쩍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나의 세계관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셈이다. 어쩌면 이 글은, 98년의 내가 무대 위에서 이야기하고자 했던 그 서툰 저항의 또 다른 변주일지도 모른다.


공연은 학내 공연장을 하루만 빌려 두 차례 올렸다. 관객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누군가의 부모님, 친구들. 기껏해야 삼, 사십 명 정도였을 것이다. 그렇게,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연출 공연 ‘감옥’은 끝이 났다.


시작(詩作)이라는 건 억지스러운 몸부림, / 나를 가두는 어둠을 안고 세상 앞에 마주 서는. / 어느 누구 귀 기울일 때, 나는 또다시 자유가 돼… - 노래 ‘시를 써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