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반찬, 굴비

by 양경인

양구는 초행이었다. <박수근미술관>이 화가의 고향에 세워졌다는 얘기는 오래전에 들었지만 지방에 살던 나는 멀고 아득하게 느껴져 갈 엄두를 못 냈다.

박수근 기일을 맞춰 제정된 ‘박수근 미술상’ 수상식에 자리를 같이하자는 후배의 권유를 단박에 받아들인 것은 그동안 화가에게 받은 것이 많아서였다. 기회에 좋은 원화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도 있었지만, 그림에 대한 기대가 크지는 않았다. 몇 년 전 위작 문제가 불거지면서 박수근 전시에 나오는 작품의 50%는 가짜라는 의견이 연구자들 사이에 꽤 퍼져 있었다. 더구나 그림 값이 워낙 비싸 재정자립도가 열악한 양구군의 한정된 예산으로는 좋은 그림을 사 오기가 어려울 거라는 짐작도 있었다.

서울 압구정동 현대백화점에서 출발하여 2시간 반 거리에 양구는 있었다. 박수근이 아니었다면 내가 ‘양구’라는 지명을 알 수 있었을까. 박경리 “토지”로 평사리를 알았고, 박완서로 개성에 ‘박적골’이란 마을이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처럼.

경기도 가평에서 강원도 양구로 들어가는 고속도로 길 옆으로는 산과 계곡이 첩첩하였다. 저 깊고 푸른 계곡에서 자라는 산나물이 약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 양구는 ‘곰취 축제’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산과 산을 가두어 만든 소양강댐은 물안개가 한창 피어오르고 있었다. 초록 산맥이 물빛에 갇혀 물방울이 맺히는 장면을 보고 신기해하다가 비 오는 고속도로를 달리며 차창에 맺힌 빗방울이라는 것을 알고 실소하기도 했다.


박수근의 그림을 처음 본 것은 1999년 여름, ‘박수근 35주기 전’에서였다. 그때 전라남도 나주에 살던 나는 8살, 6살 두 아이의 엄마였다.

따라나서는 큰애와 새벽 4시 출발하였다. 그때 내가 살던 나주에는 서울로 가는 기차 편이 없었다. 광주로 나가서 갈아타고 서울역에 내리니 오후 한 시가 되었다. 물어물어 중앙일보 사옥인 호암아트홀에 들어갔을 때는 비가 세차게 내렸고 전시관에 온 사람들 손에는 모두 우산이 들려 있었다.

<아이를 업은 소녀>는 바로 나의 초상이었다. 육 남매의 맏이였던 나. 내 등이 가벼울 때는 학교에 있을 때뿐이라 집에 오는 시간을 되도록 지체했었다. 등허리에는 늘 시금 퀴퀴한 냄새가 났었지. 아이에게 “저 모델이 엄마야” 했더니 “정말요? 화가 아저씨랑 친했어요?” 놀란다. 그때의 나를 애정 어린 마음으로 바라보기까지 이만큼 걸렸다.


화집으로 볼 때는 <나무와 여인>처럼 인물이 들어간 나무 그림이 많았는데 직접 와서 보니 <고목> 시리즈나 <봄> 등 나무 자체만 그린 그림들이 더 많았다.

박수근의 나무는 나무의 골격, 그 본질을 그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나무는 대부분 겨울나무로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분홍과 연둣빛이 풀리는 세상을 향해 꽃을 피우는 나무조차 개화의 기쁨을 느끼기가 힘겨웠다. 복사꽃이 어느 날 그냥 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저 삭정이처럼 마른 나뭇가지에서 겨우내 응축시켜 둔 수액이, 은총처럼 퍼지는 봄의 기운에 가까스로 물이 돌아 틔워낸 힘으로 꽃을 만들었다는 것을 아프게 보여주고 있었다.

이번에 양구에서 본 그림들은 소품이 대부분이었다. 실내조명이 너무 어두워서일까, 예전 같은 감동을 느끼지는 못했으나 전에도 보았던 <굴비> 그림에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볼수록 한국인 영혼의 밥반찬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굴비>, 1962, 15*29, 박수근미술관


이번 전시에서 그의 그림에 소리가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골목 안>의 아이들은 활기찬 재잘거림이 없었다. <시장>에는 왁자지껄함이 없었고, <절구질하는 여인>에서도 쿵쿵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장구와 태평소를 불며 원무를 도는 그림 <농악>에서조차 흥을 누르는 무거운 공기가 느껴졌다.

1950-60년대의 한국사회에서 유흥을 즐기며 살았던 사람은 극소수일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허리띠를 졸라매었고 배 나온 사람이 부자의 대명사였던 시대. 남자들은 일거리가 없어 골목에서 소일하고 당장의 먹거리는 주부들의 몫이 되었다. 우리 집도 이웃집도 그렇게 살았다. 그런 삶을 소중한 가치로 남긴 박수근, 그의 그림은 1950-60년대 서민의 풍속도였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 그때 나주에서 어렵게 상경하여 본 그림도 위작이 많았다고 한다. 진짜의 삶을 살고자 애쓴 화가의 노고가 무색하게도. 그때 본 겨울나무의 그림이 위작이 아니었기를, 바싹 마른 검은 가지에서 봄꽃이 어떻게 피는지를 내게 처음 보여 준 그림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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