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렵이불을 말리며
분가하겠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딸은 스물여덟에 뜻을 이뤘다. 직장 사주에게 애원과 눈물로 읍소하며 양재역 근처 오피스텔을 지원받은 것이다. 분가의 내적 조건 속에 ‘부모 도움 없이’ 조항이 있는 듯 딸은 한 푼의 지원 요청도 하지 않았다. 일주일 지내보더니 이불, 베개 , 침대커버는 집에서 가져가겠다고 통보(?)했다. 이때다, 나는 딸이 시큰둥 반응하여 5년 넘게 옷장 속에 개켜두었던 차렵이불을 꺼냈다. 초가을볕에 보송보송 마르는 이불 냄새를 맡으며 맨 처음 떠오른 장면은 페데리코 펠라니 감독 영화 <길>이다.
2차 대전의 상처가 남아있는 이태리 해변 마을, 뜨내기 서커스 단장 잠파노는 1만 리라에 어린 처녀 젤소미나를 사서 조수로 데리고 다닌다. 거칠게 다루는 잠파노에 주눅 든 젤소미나는 트럼펫을 가르쳐주며 살갑게 대하는 곡예사와 만나며 생기를 찾아간다.
- 하찮게 보이는 돌멩이도 존재 이유가 있어. 이게 소용없다면 만사가 소용없어. 저 별들 마저도. 난 그렇게 믿어. 너도 어딘가에 쓸모가 있을 거야.
눈을 껌벅거리며 알듯 말듯한 표정을 짓는 젤소미나를 연기한 배우 줄리에타 마시나는 심리학에 정통했다고 한다. 성향이 다른 두 남자는 사이가 안 좋았고 잦은 싸움 끝에 잠파노가 곡예사를 살인하게 된다. 이 장면을 목격한 젤소미나가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자 잠파노는 젤소미나를 해변 마을에 버리고 떠난다. 그리고 다시 그 마을에 들렀을 때, 하얀 빨래를 널면서 노래를 흥얼거리는 여성을 만난다. 그 노래는 젤소미나가 즐겨 연주하던 트럼펫 곡이었다.
페레리코 펠리니의 영화 <길>의 한 장면
- 방금 부른 노래는 어디서 배웠나요?
- 어떤 실성한 여자가 이 노래를 부르며 이 마을을 돌아다녔죠.
- 그 여자는 지금 어디 있나요?
- 죽었어요.
인생유전, 전후 상황이 아니라도 부초 같은 삶을 사는 무리들은 어느 곳에나 있다. 우리 근대화 과정에도 이런 사람들을 풍각쟁이나 딴따라. 3류 배우등으로 비하시켰던 시기가 있었다. 이십 대에 이 영화를 보면서 젤소미나 처지도 가여웠지만 잠파노의 황폐한 삶과 그들의 거친 유랑생활에 더 비애를 느꼈다. 나에겐 유목민보다 농경민의 정착 DNA가 더 우세한 모양이다. 내게 그때 빨래는 정착의 이미지, 안정된 생활의 모습으로 보였으니까.
내가 아기를 키울 때는 천 기저귀를 쓸 때라 아기가 자는 틈에 기저귀를 삶아 베란다가 하얬다. 겨울에는 거실, 방안까지 점령한 휘장 아래서 팥 벌레처럼 배밀이하던 딸. 부유하던 내 삶이 비로소 닻을 내린 것 같았다. 그러나 잔잔한 평화로움과 그들먹한 충만감을 주었던 딸아이는 사춘기 때부터 비싼 이자를 더한 청구서로 받아갔다.
딸에게는 유목민의 피가 더 우세한가 보다. 어릴 때부터 미지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 단체로 어딜 가면 금방 사라지기 일쑤였다.
겨울방학 제주도 갔다가 저물녘에 올망졸망한 조카들과 제주시 별도봉 장수로를 걸을 때였다. 내 아이만 안 보여 눈을 빼고 둘러보면 저만치 혼자 허적허적 산등성이를 올라가고 있었다.
- 같이 다녀야지, 왜 그렇게 앞서 달리니? 산의 밤길은 위험해
- 다음 풍경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어, 엄마
지금 생각하면 블라디보스토크 어딘가에 산다는 은빛 여우를 동경하는 아이에게 정착의 요령만을 가르치려 했던 것은 아닌지. 성인이 돼서도 고비사막, 아틀란트 사막 등이 즐겨가는 여행지라 딸의 여행가방은 배낭이다. 얼핏 본 배낭 속에는 가성비 좋은 세계 각국의 등산용품이 작은 부피로 접혀 들어 있었다.
나의 이십 대는 어떠했던가. 제주에 살면서 태평양 푸른 바다의 수평선이 넘을 수 없는 감옥처럼 여겨진 적이 있었다. 1980년 대의 나는 농경민처럼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딸은 경계를 지우며 국경을 넘나들고 있다.
지금도 그러하겠지만 15년 전 상하이에 처음 갔을 때 가장 인상적인 것은 아파트 앞에 주렁주렁 내걸린 빨래였다. 이불도 속옷도 다 나와 내걸렸다. 이 장면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중국인은 자신감이 넘치는 민족이구나 싶었다. 관광객이 붐비는 도시 한가운데서 뭍 행인들이 지나가는 곳에서 버젓이 내놓은 생활의 모습이 나에게는, 관광이고 도시 미관이고 자신들의 삶이 우선이라는 당당한 선언처럼 보였다.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이 번갈아가며 나라를 지배했던 중국 역사 속에서 민중들은 실용성이 우선되는 생활 문화를 이룬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고무장갑도 세탁기도 없던 시절 마당 수돗가에서 산더미 같은 빨래를 하고 있으면 놀러 온 친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 이 많은 걸 언제 다 하고 노니?"
가사노동은 엄마 몫이라고 생각한 친구는 외동이었다. 12살에 6남매 맏이가 된 나는 빨래 만이라도 바쁜 어머니 손을 덜고 싶었다. 막내 낳은 엄마의 피 묻은 속옷 빨기부터 토요일 오후 세숫대야에 삶아서 밤중에 널었던 면 생리대, 그리고 두 아이 기저귀를 넘어 꾸역꾸역 밀려오는 빨랫감만큼 내 마음도 정착되어 갔다. 다행인 것은 겨울철 찬물에 맨손으로 했을 빨래가 고되게 기억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가사일 농사일로 바쁜 엄마 일손을 덜어보려고 내가 나름 애썼구나, 하는 자긍심으로 작용한다. 기억은 유리한 쪽으로 윤색되는 것이므로.
오노레 도미에 < 세탁부>, 목판에 유채, 49*33.5, 1863년경, 오르세 미술관, 파리
프랑스의 풍자화가 오노레 도미에(1808-1879)는 우리나라 박수근 같은 화가다. 가난한 유리공의 아들로 태어난 그의 눈에 비친 도시 파리는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에서 보기 어려운 장면들이다. 당시 세탁부 직업은 노동 강도에 비해 보수가 적은 가장 천한 직종의 하나였다. 뒤로 보이는 건물이 파리의 모습이고 센 강은 당시 빨래터였던 모양이다. 그는 산업사회 성장의 빛보다 그림자에 주목한 화가였다. 그래도 도미에는 암울하게만 그리지 않았다. 빨래방망이를 오른손에 들고 엄마 도움을 받으며 계단을 올라서는 아이의 표정은 퍽 다부지다. 앙다문 입과 큰 보폭으로 엄마손을 놓치지 않겠다는 결기가 느껴진다. 아마 이 엄마는 저 딸의 존재로 세탁일이 덜 힘들었으리라. 이목구비를 희미하게 표현한 것은 이 모녀의 개별성보다 대표성을 강조하고픈 화가의 의도일 것이다. 모녀로 보이는 두 사람의 옷 빛깔이 어두운 색인 것도 세탁의 의미를 생각할 때 대비의 효과를 더해준다. 노을빛이 반사되어 황금빛으로 물든 파리의 시가지와 강물, 그리고 강기슭의 에메랄드빛은 단순 분류할 수 없는 노동의 여러 결을 담고 있다. 나의 빨래 기억이 그러했듯이.
이 작품이 그려진 시기는 프랑스가 한창 산업화의 길에 접어들었을 때니 우리나라로 치면 1960-70년대쯤과 비슷할 것이다.
저 이불이 끝없이 시공간을 이동하며 사는 딸의 성향에 살포시 내려앉아 포근한 휴식이 되기를 바란다. 빨래, 하얀 빨래가 마르는 풍경을 보면 마음이 환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