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0년대, 제주시
1966년 3월 1일, 어머니는 네 번째 딸을 낳았다.
새 아기가 태어나던 날은 차가운 기운을 어느 정도 벗어젖힌 귀한 볕살이 챗방(마루와 부엌 사이 작은 마루)에 깊숙이 퍼져 들었다. 동네 어른들께 마루로 쫓겨난 나는 창호지를 뚫어 문틈으로 어머니 해산 과정을 엿보았다.
동네 아주머니 두 분이 어머니 머리맡에 앉아 양 어깨를 내리누르고 있었다. 쪽마루로 비스듬히 들어오는 노곤한 봄볕에 겨워 동생들은 모로 쓰러져 잠이 들었고, 나도 설핏 잠이 들었는데 깨어나 보니 산파 할머니가 비닐이 깔린 바닥에서 무슨 창자 같은 것을 쓸어 담고 있었다.
딸이라는 수군거림이 분위기를 침울하게 하였던가. 난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내 울음소리에 기진한 어머니도 벽으로 돌아 흐느꼈다.
안방 구석에 시멘트 종이로 싼 아기 태는 일주일이 넘어도 그대로 있었다. 어머니는 딸만 내리 넷을 낳았으니 아버지께 부탁도 못하고 영등 바람이 물러가기만 가다리다 얼굴을 미라처럼 감싸고 바닷가로 갔다. 영등 할머니가 나를 불쌍히 여기면 바람이 잦으리라 믿으며 방파제로 올라가 소포 꾸러미처럼 싼 여동생의 태를 힘껏 던졌다. 다시는 내게 제발 생명을 점지하지 말라고 용왕신께 빌고 돌아오는 길에 만난 가겟집 할머니는 갯바람에 절은 어머니를 보고 놀랐다.
" 이거 어떵된 일이고? 영등 보름에 나왕 아기 어멍이 큰일 나젠 햄구나(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영등 바람이 아직 남아있는데 산모가 큰일 나려고"
며칠 후 국민학교(초등학교) 입학식이 있었다. 해산하기 전 어머니는 책가방과 공책, 연필 두 자루, 파란 바탕에 주홍색 금붕어가 그려진 연필깎이 칼을 사두고 벽장 안 궤(櫃) 위에 올려놓았다. 난 심심하면 메밀껍질로 속을 채운 베개를 다 꺼내 쌓아놓고 벽장에 올라가 만져보기를 즐겼다. 가방은 빨간색 비닐에 큼지막한 노란 장미가 양각된 백팩이었다. 막상 학교에 가보니 내 가방은 평균을 밑도는 품질이었음이 드러났다. 급장(반장) 부급장을 하는 아이들의 가방은 무늬가 없는 빨간색 가죽으로 된 것이었고 크기도 내 것보다 차이가 났다. 그 가방이 수입품 란도셀 가방이었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동네에서 우리 집은 '기와집'으로 통했다. 하지만 방 네 개중 우리 가족 6 식구는 큰방 하나만 쓰고 나머지 방들은 세를 주었다. 대문 밖을 나가면 가까운 곳에 '전재민(戰災民) 나라비(일본어, 열을 지어 늘어선 모양)''라 부르는 바라크 촌이 있었다. 그 구역에 사는 아이들 중에 중학교 이상을 진학한 아이들은 없었다. 국민학교를 겨우 마치고 거리를 쏘다니며 휘파람을 능숙하게 불어 제치는 복순이 언니는 우리들의 대장이었다. 언니는 가끔 목에 붕대를 감고 다니며 어른들의 쑥덕거림을 태연히 받았다.
강요배 <시원(시원)>,38.7*53.2, 종이. 펜. 먹. 붓, 1989
‘전재민 나라비’ 사는 염방할머니가 우리 집 해산 때가 되면 오셨다. 염방이란 일본 말로 4번(요방) 즉 네 번째 집에 산다는 뜻으로 자식이 없던 할머니는 누구의 할머니가 될 수 없어서 동네 사람들은 모두 이 칭호를 썼다.
제사나 명절이 끝나면 염방할머니 집에는 밥을 꼭 가져갔다. 제사 뒷날 아침 큰 알루미늄 쟁반에 떡 접시와 놋주발에 담은 곤밥(쌀밥) 한 그릇을 들고 가서 할머니가 그릇을 비우는 동안 다시 집으로 와서 국그릇을 흘리지 않게 가져가려면 행여 학교 늦을까 조바심이 났다. 그래도 파뿌리 머리에 쪽을 진 염방할머니가 가는 몸피 전체로 나를 대견해 하는 모습을 보면 엉킨 마음이 녹아 빈 그릇을 받아 오는 발걸음은 가뿐했다. 부엌에 그릇을 내동댕이치듯 던져놓고 부리나케 책가방을 매고 달리면 발이 날아다녔다. 어린 동생들과 잔심부름이 없는 학교는 나의 낙원이었다.
1학년 담임 선생님은 고대기로 높게 부풀린 머리에 여드름이 살짝 긴 복스런 얼굴이었다. 한글 받아쓰기를 시키며 초록색 보자기에 건빵을 싸와서 우리들을 현혹시켰던 열성적인 교육자였다.
봄 소풍날이 다가왔다. 그때 소풍과 운동회날은 집안은 물론 동네 축제였다. 어머니는 없는 살림에도 동네 편물 가게 언니에게 부탁하여 봄 스웨터를 맞춰주었다. 바늘구멍이 송송 나며 무늬를 만들었던 진노란색, 닭털 빛이었다. 하의는 어머니가 재단한 주름 잡힌 포플린 치마에 하늘색 스타킹을 입었는데 그때는 스타킹을 '살 양말'이라고 했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서서 구덕(큰 대바구니)에 먹을 것을 지고 소풍의 긴 도보 행렬을 뒤 따랐다. 제주시 남문로에 있던 국민학교 운동장에서 출발하여 동문로터리를 넘어 별도봉으로 이어지는 긴 행렬 속에 어머니는 없었다. 집에는 젖먹이까지 합치면 두 살 터울 동생 셋이 있었으니까.
어머니는 연한 색상은 빨랫감을 늘인다 하여 피하셨고, 머리 빗길 시간이 없어 나 스스로 머리 건사를 할 수 있을 때까지는 이발소에 가서 깎아야 했다. 그때 신었던 스타킹도 명도가 시원찮은 파랑, 빨간색이었다. 야리야리한 얼굴의 여자아이가 치장한 억센 진노랑과 빨강의 콤비네이션. 민망한 그 차림으로 얼마나 설쳐댔는지. 그 당시 하얀 스타킹을 신은 아이들은 신분이 좀 달라 보였다. 다행히 우리 동네에서 하얀 스타킹을 신은 아이들은 없었다.맨다리 차림의 아이들도 있었다.
전재민 나라비에 사는 사람들은 우리 집 마당을 빌려 잔치를 치렀고 , 여름에는 냉국에 쓸 시원한 물을 얻으러 양은 주전자를 들고 오는 아이도 있었다. 우리 동네에서 번듯한 직업을 가진 아버지들이 없었고 제사떡을 나누던 '은행 집'이 그중 나았는데 나중에 알아보니 은행 수위라고 했다. 은행 집 아내는 지점장 부인이 젖이 안 나와 젖어미 역할을 해 주고 자갈밭 하나를 받았다.
우리 집에는 제주도립도서관 서기로 근무하는 샛아버지(아버지 동생)가 점심밥을 먹으러 드나들었다. 제주도립도서관과 우리 집은 지척이었다. 할머니가 사는 마을은 오라리 중산간 마을로 미혼인 샛아버지가 직장 가까운 우리 집에서 식사를 하게 된 것이다. 조를 섞은 누런 보리밥을 사기 주발에 담아 고봉으로 드리면 한 번도 남기지 않고 다 드셨다.
우리 집 셋방에 살던 여고생 언니는 제주시교육청 타이피스트가 되었다. 시교육청이 도서관 바로 붙은 건물이어서 샛아버지하고 친하게 지냈다. 난 그 언니가 우리 가족이 될 것만 같았는데, 그것은 셋아버지의 짝사랑이었을 뿐이었다. 흰 고무신에 하얀 니트, 감빛 스커트를 입고 배처럼 연하게 웃는 모습이 참 고왔다.
박수근 <아이를 업은 소녀>,1953, 캔버스에 유채, 27.5*13, 개인 소장
겨울방학이 되어 크리스마스 날 샛아버지는 장가를 갔다. 난 동생을 돌보라는 성화를 피해 어머니가 안 보이는 곳으로 가서 할머니 집 동네 아이들에게 으스대며 놀았다. 제주도 속담에 " 식게(제사) 집 아이 독하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 할머니 집에서 잔치를 하는데 내가 기고만장하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8살에 세 명의 동생을 본 나는 학교에 있는 시간을 제외하면 동생을 업고 놀아야 했다.
결혼 전날 할머니 집 정낭(대문)이 치워지고 동백잎으로 장식한 커다란 아치형 문이 세워졌다. 군데군데 커다란 종이꽃도 붙어있고 하얀 창호지에 먹으로 멋들어지게 쓴 한자 (아마 '祝 結婚'이었으리라) 휘장도 걸렸다.
제주도 시골집에서는 이런 동백나무가 흔했다.
하얀 와이셔츠에 이발한 머리를 포마드로 빗어 넘기고 싱글거리던 샛아버지가 밤이 되자 신경질을 내기 시작했다. 동네 건달패 청년이 할머니 집 뒷 처마에 매달아 둔 돼지 뒷다리 한 짝을 훔쳐 달아났다는 것이다. 어른들은 쉬쉬 조용하라고 어르는데 샛아버지의 신경은 점점 날카로워졌고 밤늦게는 할아버지하고 크게 다투어 잔치 집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부엌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비로소 쑤군거리기 시작했다. 잔칫날 신부상에 올릴 계란 돈가스*를 만들던 눈치 빠른 친척이 한마디 했다.
“아이고, 이 집 샛아들(둘째아들)은 호랑이 같은 아버지를 이기고 장가 가젠 햄신게(가려하는구나)”
할아버지는 성냥만 쓱 갖다 대면 폭발할 것 같은 팽팽한 긴장 속에서 천방지축 날뛰는 둘째 아들을 피해 올레 밖 고모할머니네로 피신 갔다. 할아버지가 떠난 마당은 헐렁해지고 친척 할머니들이 종종걸음으로 왔다 갔다 하며 그 뒤숭숭한 상황을 정리하였다.
계란돈가스(사진: food place)
어쨌거나 결혼식날 하얀 한복에 진주 귀걸이를 하고 머리를 높이 올린 신부의 모습은 내가 지금까지 봐 온 예쁜 사람들 중에 단연 으뜸이었다. 결혼식 뒷날 귤빛 한복을 입은 샛어머니와 연보랏빛 양단 저고리에 청회색 치마를 입은 어머니가 나란히 사돈집에 드릴 보따리를 양손에 들고 할머니 집을 나서는 모습은 내 가슴을 벅차게 했다. 오라리 마을에서 제일 고운 색시를 아내로 맞은 샛아버지의 벙싯거리는 입매도 보기 좋았다.
제주시 오라리 마을의 보리밭
이듬해 6월 보리가 팰 무렵 어머니 심부름으로 할머니 집을 갔을 때 샛어머니는 신혼방에 방석을 단정히 깔고 신문을 보다가 은은한 미소로 나를 맞아주었다. 잠시 후 샛어머니는 갈적삼, 갈몸뻬로 갈아입고 집 가까이 있는 동녘 밭에 가서 낫으로 보리 콩을 베어다 삶아주었다. 갈중이(풋감으로 물들인 노동복) 옷을 입어도 셋 어머니는 여전히 우아한 자태가 났다. 늦봄 난간 마루에 샛어머니와 둘이 앉아 까먹던 보리 콩. 그러나 그게 내가 본 마지막 모습이었고, 샛어머니는 가을이 오기 전에 바리바리 해 온 혼수를 고스란히 두고 친정으로 가버렸다. 다시 할머니 집을 찾았을 때 한때 화려하게 빛나던 구들(방)은 다시 어둑해지고 샛아버지는 등피**도 켜지 않는 구들 구석에 한 손으로 베개를 만들어 괴고 망연히 누워 있었다.
“ 성자야, 샛어머니가 가버렸져, 내가 싫다고...”
그 후 어머니는 동서(샛어머니)와 찍은 사진을 전부 불살라버렸다. 어른 세계의 고민은 내 알 바 아니었기에 그때 가장 예쁘게 나온 한 때 샛어머니였던 분의 사진 한 장을 살짝 숨겨 두었다. 예쁘고 고운 것에 대한 눈이 떠지는 시기였다.
* 다진 쇠고기를 양념하여 삶은 달걀에 두껍게 입혀 튀긴 요리. 영국의 스카치에그와 같다.
* * 남포등에 바람을 막고 불빛을 밝게 하기 위해 씌우는 유리로 된 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