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 김점선
서른을 넘기고 결혼한 나는 교통사고를 당해 첫 아이를 유산했다. 그 후 1년여의 실의와 인내를 교차하며 아기를 가지게 되었을 때의 기쁨은 컸다. 세상이 말하는 적령기에 결혼하여 쉽게 아이를 낳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시댁 친구들이나 친지들에게 이름 대신 '~ 엄마'로 불리고 싶은 내밀한 갈망을.
임신이 되었음을 알았던 날, 철이 일러 먹기에도 부담스러운 딸기를 한 광주리 사 와서 딸기잼까지 만들었다. 꼼꼼하게 가계부를 운영하던 당시의 나로서는 대단한 호기를 부린 셈이었다. 평소에는 물건 값을 많이 깎아야 직성이 풀리는 내 성격의 변화도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파마를 하려고 어수룩한 동네 미용실을 찾았을 때, 미용사의 자질구레한 공력이 눈에 잡혀서 미리 깎았던 5천 원을 다시 얹혀 드리고 마음이 개운했던 기억이 난다. 혹여 남을 서운하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생명을 위협하는 모든 것- 환경오혐, 먹거리 문제, 핵문제- 에 부쩍 관심이 가기 시작하여 책이나 신문을 자주 들여다보고 강연이 있으면 만삭 된 몸을 끌고 참석했다. 내가 잉태한 한 생명에 대한 책무라 여겨졌던 것이다.
삼십을 넘긴 나의 첫 출산은 난산이었다. 짐승처럼 살려달라고 울부짖으며 오랜 진통 끝에 아이를 낳았을 때는 내 목은 쉬어 소리가 나질 않았고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쳐 아기를 볼 의욕조차 일지 않았다. 그러나 돌아눕기도 어려운 몸 상태에서 가까스로 허리를 세워 아기에게 초유를 먹이기 시작했을 때 '내가 살았구나'하는 안도와 더불어 나의 해산을 도운 두 어머니의 노고에 가슴이 더워졌다. 특히 항문 관장을 시켰을 때 나오는 배설물을 친정어머니를 만류하며 직접 치우고 닦아주시던 시어머니를 보면서 그 진통의 짬에서도 그동안 마음이 맞지 않아 옹송그렸던 마음이 풀어져 가고 있었다.
그렇게 첫 아이를 낳고 이레 째 되는 날, 병원 음식을 물리치고 푸른 바다가 넘실거리듯 출렁이는 미역국을 대야 만한 국그릇으로 먹었다. 시장을 몇 바퀴 돌며 샀을 제사 때나 먹어보는 분홍빛 옥돔을 뽀얗게 우려낸 미역국을 큰 사발에 받아먹자니 제주 바다를 들이마시는 것 같아 가슴이 벅찼다.
동짓달 긴긴밤에 나를 낳은 친정어머니는 여름의 두 배가 되는 밤의 길이를 배가 고파 감당할 수가 없었다. 나는 젖이 모자라 콩 볶듯 사납게 울어대고 어머니는 저녁거리로 먹다 남은 콩죽 생각이 간절하였지만 시어머니(친할머니)께 차마 그 말을 못 했다. 뜬 눈으로 밤을 새우자니 겨울밤이 그렇게 길다는 것을 처음 알았노라 하셨다. 천정 낮은 어둑한 방에 불기도 없이 누워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한없이 그리워하며 새벽을 맞곤 했다는 어머니. 무뚝뚝한 시어머니가 건성으로 해주는 음식을 받아먹은 게 사무쳐서 둘째 아이를 가졌을 때는 미리 양식을 준비해 놓았는데 봄에는 밤이 절반으로 줄어 밤참 없이도 날이 밝더라고 했다. 어머니는 제주 4.3 때 고아가 되어 친정이 없는 분이고 나 또한 외가라는 말을 모르고 자랐다. 김이 펄펄 나는 미역국을 먹으려니 그 말이 떠올라 땀과 눈물이 뒤범벅되어 국사발 위로 떨어졌다. 덕분에 나는 산후조리를 잘 받아 1월에 출산을 했어도 젖이 철철 넘쳐 아기의 배를 채우고도 곳곳에 젖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모유를 먹였다.
르노와르, 젖먹이는 여인(1893-4), 41.2*32.5 ,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
팽팽히 차오른 젖무덤에 아기가 머리를 묻어 빰을 씨근거리면 목젖으로 젖 물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내가 서른 해 넘게 살면서 맛본 어떤 기쁨, 그 어떤 황홀과도 바꿀 수 없는 수유의 시간. 아기가 명주 올 같은 머리털을 흠뻑 적시며 버겁게 젖을 빨다가 지쳐서 잠시 나를 쳐다볼 때면 두 혼이 만나는 희열을 느낀다. 이 순간만큼은 아기의 머리털을 쓰다듬으며 "엄마는 너를 위해 정직하고 바른 일만 하며 살겠노라'라고 다짐하게 된다.
직장생활을 하며 내가 여성임을 한탄하며 자학한 적이 종종 있었다. 아이를 낳고 그러한 콤플렉스는 사라졌다. 아니 오히려 내가 여성으로 태어나 가장 가치 있는 노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뿌듯해진다. 더불어 한 생명의 담지자로서 내 몸이 몹시 소중하게 생각된다.
잠을 깊이 자서 평소에는 누가 업어가도 모르겠다고 놀림감이 되던 내가 아기가 뒤척이는 소리만 들려도 깨게 된다. 전에는 편식을 하는 편이었고 기분이 안 좋을 땐 결식도 자주 했지만 아이를 낳고부턴 제 때 챙겨 먹는다. 엣 어른 말씀처럼 나는 " 남(아기)의 양식을 지고 다니는 사람"이니까. 아이 낳고 3시간 이상 계속 자보지 못할 정도로 시달렸는데도 얼굴이 편안해졌다는 인사를 받는다.
친정집 동네에서는 아기 엄마의 젖이 시원치 않으면 동네 엄마들이 젖을 나눠 먹이며 그 아이를 같이 크게 했다. 내가 아이를 낳고서야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알았다. 내 아기가 아까우니 남의 아기도 소중해지는 마음, 그런 인정 속에서 나는 가난이라는 말을 모르고 자랐다.
제주도 속담에 "미역 짐과 아기 짐은 무겁지 않다"는 말이 있다. 자식은 업으면 핏줄에 대한 애정으로 무거운 줄 모르고 , 과거 자급자족하던 때 미역은 무거울수록 돈이 되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10 킬로그램이 넘는 아기를 마냥 안고 다녀도 무거운 줄을 모른다. 사람들이 북적대는 곳에서 가슴을 풀어 젖을 먹이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른다. 그러면 문득씩 어머니도 나를 이렇게 귀히 키웠겠구나 하는 상념에 잠기게 되고 좀 더 부모 심정에 다가서게 해 준 아기의 존재에 가슴이 그들먹 해진다.
금릉원 입구에 있는 설문대 할머니(조각 장공익, 사진: 바람처럼 leoghi66 )
제주 신화에 나오는 거대 여신 설문대 할망(할머니)는 제주 창조신이다. 창조란 곧 생명을 낳고 기르는 일이니 돌조각가 장공익(작고)은 설문대 할망을 젖가슴에 오백 아들이 매달려 젖을 먹고 있는 형상으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