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이 샤갈전을 보고 한 말

by 양경인

큰딸이 중학생일 때 서울시립미술관에 샤갈전을 보러 갔었다.
전시를 보던 딸이 속삭였다.
" 엄마, 난 사랑의 색깔이 따로 있는 줄 알았는데, 샤갈을 보니 세상의 모든 색이 사랑의 색이 되는 거네요"
질 좋은 크레파스와 수채화 물감을 맘껏 쓸 수 있었던 환경에서 자란 탓일까, 딸의 눈을 쫓아 그림을 보면 내 눈이 못 보는 것들을 볼 수 있었다. 딸은 막 사춘기에 진입하고 있었다. 그때 딸이 보았던 그림은 아마 이 그림이 아니었을까 싶다.


<생일>, 카드보드에 유채, 1915년 작, 뉴욕 현대미술관

좋아하는 상대가 똑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평범한 유대인 가정의 샤갈에게 보석상 집 딸 벨라는 벅찬 상대였다. 그런 벨라가 샤갈의 생일에 찾아와 만찬을 준비하는 이 그림은 검은 벨벳의 원피스와 검은 바지, 그리고 밝지 않은 초록 윗도리가 주조를 이룬다. 하지만 붉은 바닥이 내뿜는 사랑의 공기가 두 사람을 둥실 떠오르게 한다. 저런 색은 보통 불안의 색이지 않았나? 남자의 황홀감은 키스의 각도에서 절정에 달한다. 장례식에 더 어울릴법한 두 사람의 옷차림은 당시 벨라의 의상을 그대로 재현했을 수도 있겠지만 샤갈의 색에 대한 자신만만함을 느끼게 한다.

나는 지금까지 색을 느끼며 그림을 자유롭게 그려본 경험이 없다. 초등학교 입학하며 어머니가 사준 노랑 고무줄로 묶은 ‘파랑새 크레용’은 힘을 주어야 색이 나왔다. 교실 게시판에 그림을 붙일 수 있는 아이들은 크레용이 아닌 크레파스로 그렸다. 왕자표 크레파스가 그때 내게 주어졌다면 내 인생은 다르게 펼쳐졌을까?

고1 때 첫 미술 수업은 한 달간 스케치 한 점을 그리는 것이었다. 첫 그림에 혹평을 받은 나는 다시 그리기로 마음먹고 해가 올라오기 전 등교해 아침 조회시간 전까지 교정 담 너머 보이는 남양 방송(제주 mbc 전신) 한옥을 정밀 스케치했다. 수키와와 암키와 사이에 연둣빛 풀이 삐끗 솟아나고 있던 쇠락한 한옥집. 내가 그린 것은 기와 대문이었다. 아침 해가 일정하게 비치는 시간에 돌담 위에 스케치북을 펼쳐놓고 그리다 보니 어느 날 기와 형체가 나타나 신기했더랬다. 드디어 최고점을 받아 어리둥절해 있는데 같은 장소를 그린 옆 반 친구가 내 그림을 보러 왔다. 이 경험은 누구나 노력으로 갈 수 있는 경지는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재능은 그다음부터일 거라고. 그 당시 흔했던 불자동차 그리기 대회에 입선 조차 해 본 적이 없던 나였다. 이런 나에게 샤갈의 색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건 오십을 훌쩍 넘겨서다.


<와인 잔을 든 두 사람>, 1917-18, 캔버스에 유채, 235*137, 파리 국립현대미술관

러시아 전설에 사람의 눈이 두 개인 이유는 행복과 불행을 모두 느끼는 인간의 본성 때문이라고 한다. 아내의 눈 한쪽을 가리고 있는 이유는 세상의 좋은 것만 보게 하고픈 샤갈의 애틋한 마음일 것이다.

소비에트 정부가 들어선 크렘린 궁전과 고향마을의 대조, 러시아 혁명의 와중에서 샤갈은 이 그림을 그렸다. 샤갈은 비테프스크에서 성심껏 일해보고자 혁명 직후 비테프스크 지역 미술 인민위원 겸 미술학교 교장으로 있었으나 소비에트 혁명정부가 원하는 그림과 관료화되어가는 동료들의 모습에 의욕을 잃어갔다. 가족을 데리고 모스크바로 갔으나 사정은 개선되지 않았다. 여기서 샤갈은 화가들과 교류는 미약했고 문학인들과 주로 어울렸다. 목청이 높은 혁명시인 마야코프스키와는 친하지 못했지만 농민시인 세르게이 에세닌과 마음으로 교류하였다. 둘 다 자살로 30대에 생을 마감한 시인들이다. 이처럼 불안한 현실을 건너뛰는 재주가 탁월하였던 샤갈은 자신이 특히 좋아했던 보라색을 한껏 쓰며 이 그림을 그렸다. 머리 위를 날고 있는 보랏빛 아기 천사는 딸 ‘이다’의 모습이다.


<라일락 속의 연인들> 1930, 128*87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사랑의 느낌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으리라. 영과 육이 녹아드는 느낌 , 푸른빛의 변주로 그윽해지는 달빛, 남녀는 덤불 속이 아니라 화병 꽃 안에 아담과 이브처럼 누워있다. 그런데 조금도 무겁지가 않다. 자신의 몸보다 10배는 족히 됨직한 라일락꽃과 그 안에 남녀를 품은 백자 꽃병은 늠름하게 달빛을 거느리고 있다. 남자의 푸른색 몸이 닿은 곳은 더 어둡게 칠하여 파랑이 어둡지 않게 보이는 효과를 주었다. 초록 이파리와 푸르스름한 달빛 속의 라일락 꽃. 달빛으로 짠 인어의 비늘 같은 시스루 패션. 파란색은 신을 위한 경배의 색이기도 하다.

샤갈은 소비에트 혁명 후 고향을 떠나 노매드의 삶을 살았지만 파리에서 색채를 새롭게 만났고 유년의 기억과 무의식 세계까지 화폭에 끌어올려 이미지로 만들 수 있었다. 그것도 좋은 기억으로만. 첫 아내 베라가 전염병으로 사별했지만(그래도 30년을 같이 살았다), 60세에 발렌티나 브로드스키를 만나 30년 이상을 해로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모든 색을 특히 초록과 파랑을 제압하는 색의 마술사가가 되었다. 사람들이 그를 초현실주의 선조로 부를 때, 샤갈은 "비이성적인 꿈을 그린 것이 아니라 실제의 추억을 그린 것"이라고 했다.


<에펠탑의 신랑 신부>, 1938, 캔버스에 유화, 150*136. 파리 퐁피두센터


이 그림은 나치의 위협이 극에 달해 미국 망명을 떠나기 전에 완성한 작품이다. 그림에 종종 등장하는 수탉은 남성성을 상징하는데 여기서는 지상의 파라다이스로 데려다 줄 웨딩 카 역할을 하고 있다.

달 속에 해가 들어가 있고 바이올린 몸통을 한 염소, 오른쪽 아래에 빼곡히 들어선 집들. 하늘로 올라가는 은성한 나뭇잎들, 수탉의 꼬리털 안 주황색 지붕 아래 서 있는 신부는 보라색 슈트의 신부와 같은 사람인데 옆에 선 검정 정장의 남자는 신부 아버지일까.

이 그림에는 천사가 세 명 등장한다. 꽃다발을 들고 하늘로 올라가는 천사, 수탉 가슴에서 바이올린을 켜는 천사, 촛대를 들고 땅으로 내려오는 나무 옆 천사. 그 와중에 나무 위에서 책을 읽는 사람도 보인다. 샤갈의 그림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한다. 그린 시기를 생각하면 잠시 현실을 비껴서는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샤갈 그림의 날아다니는 짐승은 족쇄를 끊으려는 그의 욕망을 상징한다. 자유를 얻기 위한 수단인 셈이다. 동시대인 피카소는 샤갈의 색채에 찬사를 보내면서도 " 그 동물 그림 좀 그만 그리라"라고 했다.

가장 힘겹고 참담할 때조차 빛으로 가득한 따뜻한 삶으로 바꿔놓았기 때문에 칼 구스타프 융은 샤갈을 가장 훌륭한 화가로 생각했다. 고향의 문학 언어를 회화로 녹여내고 그곳 사람들의 삶을 시적 이미지로 변화시켜 사랑의 찬가를 그린 샤갈. 그를 초현실주의라고 명명한 사람은 시인 친구인 아폴리네르와 블레즈 상드와르 였다.

<바바의 초상> , 1953-6, 캔버스에 유화,

샤갈의 색 속에는 여러 여인이 있다. 어머니는 샤갈을 당시 부르주아 가정에나 가능했던 그림을 마음껏 그릴 수 있게 해 주었다, 스무 살에 만난 첫 아내 베라는 샤갈 그림의 사랑과 색을 만드는 원천이 돼 주었다. 그리고 딸 이다는 엄마의 죽음 후 상실감에 빠진 아빠를 위해 여성을 소개하고 정신적 후원자가 되었다. 두번 째 아내 발렌티나 브로츠스키(애칭 바바)는 유대인 여성이다. 샤갈보다 25세 연하로 첫 아내가 전염병으로 죽고 실의의 날들을 보내다 딸의 소개로 만났지만 결혼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바바는 샤갈의 그림에 다시 색채와 생기를 살려 낸 뮤즈다. 뒷에 보라색 옷을 입고 구부정한 포즈로 팔레트를 든 사람이 과거의 샤갈이다. 현란한 꽃과 해 속의 달, 노을빛 붉은 열기는 현재의 시간, 그 자연을 배경으로 앞으로 나오는 듯 환한 표정의 바바는 미래의 시간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림 오른쪽의 꽃다발을 든 사내와 신부의 그림자 또한 과거의 모습일 것이다. 여전히 배경 속엔 의식의 밑바닥에 늘 함께 있었을 크렘린 궁전으로 상징되는 조국과 화가 정서의 뿌리 고향마을이 그려져 있다.


"우리 인생에서 삶과 예술에 의미를 주는 단 하나의 색은 바로 사랑의 색깔이다"

- 마르크 샤갈의 어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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