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엘 이야기

- 강요배 <명주 바다>

by 양경인

아이들이 초등학교 가기 전 해 여름휴가는 한 점 후회 없이 보냈다. 제주시에서 나고 자라도 가까운 거리의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가 본 적이 없는 제주도 곳곳의 해수욕장을 섭렵하며 우리 가족은 모두 깜씨가 되어갔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어른들은 지쳐서 약간 여위었고 아이들은 통통했던 몸이 변하면서 그 양분은 성큼 키로 갔다.

협재해수욕장은 제주시에서 자동차로 40분 거리에 있는 하얀 조가비가 가득 깔린 해변이다. 제주에서 10~20 분 거리의 해수욕장보다 물이 맑고 주변 공기도 청량하다. 이유는 단 하나 제주시에서 다소 멀다는 이유로 사람이 상대적으로 적게 가기 때문이다. 사람이 많이 찾는 곳은 어디나 쓰레기와 악취와 오염을 남긴다. 자연을 즐기는 대상으로 로만 보기 때문이지 싶다.


강요배 < 명주 바다>, 2012


제주시 근교 해수욕장을 갈 때마다 느꼈던 비감한 심경을 갖지 않아도 되는 곳. 비췻빛 바다가 펼쳐지고 헤엄으로 닿을 수 있는 거리에 비양도를 본 우리 가족은 탄성을 터뜨렸다. 해변의 왼쪽 편으로는 굵은 조개껍데기 파편이 많아 아이들 발을 베일 우려가 있어 오른 바다에 붙어있는 협재해수욕장과 곽지 해수욕장 경계쯤에서 물놀이를 했다. 어느덧 물빛은 에메랄드 블루로 바뀌고 문득씩 겹쳐지는 군청색 바다는 수심이 깊음을 예고해 주었다.

샤워를 마치고 닭죽으로 달디 단 저녁을 먹고 나자 세 살배기 작은 딸은 지쳐서 잠이 들었다. 6살 큰 딸아이와 나는 노을에 젖은 백사장을 돌아다니다가 우리가 텐트를 친 곳 방파제 위로 올라가 신발을 나란히 벗고 밤바다를 바라보았다. 감색 바다가 출렁거리는 광경은 상당히 관능적이었다. 밤수영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간간히 보이는데 그 모습들이 고혹적으로 느껴졌고 바다 냄새도 비릿하게 훅 끼쳐왔다. 낮에는 전혀 느껴보지 못한 감정에 빠져 밤바다를 응시하는 나에게 " 엄마 저기 아리엘이 잠들고 있죠?" 하는 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저으기 당황했다. 얘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 아리엘, 아리엘이 누구지?"

" 세바스찬도 문어 마녀도 모두 모두 잠든 거예요"

딸아이가 내 귀에 속삭이듯 말했다. 그때야 딸아이가 인어공주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아이가 보고 있던 것은 낮의 소란스러움을 말끔히 걷어낸 바다의 고요였던 것이다. 그 숨 막히는 고요가 신비감을 자아내어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한 것이리라. 나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으응"대답하였다. 그 이상 물어오면 어떻게 대답할까 궁리하면서... 아이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오래오래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황홀한 표정으로.


야간 오징어잡이 배가 바다 끝에 도열해있는 것을 보고 " 별이 백 개나 떨어졌다"라고 하는 아이. 딸아이에게 가장 많은 숫자는 무조건 백 개다. 바다에 대한 이야기는 많지만 유독 안데르센의 인어공주 이야기를 좋아하고 현실로 믿는 것은 매력을 넘어 마력과 같은 디즈니 애니메이션 영향이 클 것이다. 숫자를 10까지 쓸 줄 알았을 때는 엘리베이터 층을 자유자재로 누를 수 있는 기쁨에 도취되더니 수첩을 사달라고 했다. 연필을 의기양양하게 쥐고 딸은 물었다

. " 엄마, 백설 공주네 집 전화번호 말해주세요"

인간계 왕자와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공기방울이 되어 300년 간 허공을 떠도는 실제 인어공주 이야기는 얼마나 슬픈가. 안데르센이 이런 동화를 쓸 당시 덴마크는 견고한 계급사회였다. 평범하게 서민적으로 살아가는 우리 집에서 공주에 집착하는 아이를 보며 좀 걱정이 되기도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딸아이와 같이 보았던 영화 "소공녀"에서 인도 여자가 주인공 소녀에게 " 여자는 모두 공주가 되는 것이란다. 그것은 우리들의 특권이지" 하는 대화를 들은 후부터는 아이의 공주 역할에 적극 동참하기로 했다. 여섯 살배기 딸아이가 그런 깊은 사연을 미리 알 필요는 없는 것이다.

바다의 아름다움과 신비는 '용궁'이라는 이상향을 만들었다. 내 아이가 인어공주 이야기를 되도록 오래 소유하기 위해 어른들의 해야 할 일을 곰곰이 짚어보는 협재해수욕장의 밤은 정말 근사했다. 밤은 깊어가고 한 번도 같은 색을 보여준 적이 없는 바다는 수평선을 지우며 점점 감색으로 변하여갔다.

방파제에는 이제 우리 모녀밖에 없었다.

걱정이 되어 나온 남편이 모로 기대어 자고 있는 딸아이를 추스를 때까지 우리는 오래오래 거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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