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강단에 올랐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방청객들은 띄엄띄엄 앉았지만 그 수는 꽤 많았다. 대부분 젊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강연의 공간은 작았지만 오히려 남자는 흡족해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주체 측에서 마이크를 내밀었지만 남자는 괜찮다는 신호로 손을 들었다.
"아 반갑습니다. 요즘 시국에도 이렇게 모여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뭐 그래 봤자 바이러스니까요."
간단하게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자신감 있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오늘 여기까지 와주신 분들께 약속드립니다. 오늘 한 가지는 가져가시는 것이 있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양손이 아니라 이 마음에 말이죠."
남자는 한 손으로 가슴을 툭툭치고는 익숙한 듯 왼손에 포인터로 PPT를 넘겼다. 강연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다. 주제는 간단했다. '2030 인생이 꼬이는 과정에 대하여'였다.
"오늘 제가 할 이야기는 우리 20대, 30대의 인생이 꼬이는 과정입니다. 뭐 너무 크게 뭐라 하진 마세요. 저도 같은 30대입니다. 제가 하고자 하는 말들은 지난 세월을 겪으면서 느낀 것들입니다. 우선..."
남자는 PPT를 넘겼다. '서서히 꼬인다'라는 글자가 보였다. 청중들 중 몇몇은 수첩을 넘겨 적는가 하면, 누구는 핸드폰에 적었다.
"먼저 본격적인 시작 전에 제가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바로 이겁니다. 보통 사람들은 한 번에 망하지 않습니다. 그럼 인생이 어떻게 꼬이냐. 바로 서서히입니다. 서. 서. 히. 간단하게 우리들이 살찌는 과정을 생각해보죠. 한 번에 10킬로, 20킬로 찌지 않죠? 인생도 마찬가집니다."
남자는 수려한 말솜씨를 이어갔다. 청중에 한 손을 뻗는 능숙한 제스처는 그의 강연에 흡입력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았다. 듣는 이들 중 몇몇은 작은 감탄을 냈다.
"오늘 준비한 강연의 문장은 10가지입니다. 그중 처음입니다. 처음은, 나는 타고난 능력이 있으며 언젠간 한 방이 올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현실은 아무것도 없지만요. 매일 꾸준히 하는 것, 예컨대 자격증 공부도 좋고, 외국어도 좋아요. 그런데 이런 부류는 운동도 안 해요. 그냥 주야장천 놀아요."
남자는 이제 시선을 옮긴다. 강연장 왼편으로 걷는다. 포인터를 든 손을 높게 들며 PPT 다음 페이지로 넘긴다.
"눈은 안 낮추고 현실감 없는 계획만 세웁니다. 뭐, 위와 비슷한 맥락이죠. 마치 이런 거예요. 외국어 공인 점수도, 자격증도, 높은 학점도 없으면서 대기업에 가겠다는 거죠. 제가 다녔던 곳처럼요."
남자는 조롱 섞인 어조로 말했지만, 청중들 중 그 누구도 불편한 기색은 없었다. 눈치가 빠른 남자는 더 공격적으로 밀어붙였다.
"이어서 볼까요? 이런 부류들의 인간은 그러면서 욜로나 힐링 같은 단어를 자주 씁니다. 그러면서 되는대로 살아가죠. 저축은커녕 요즘은 뭡니까? 플렉스? 라는 단어를 쓰면서 인스타그램에 자신이 산 비싼 물건을 올리기 바빠요. 마치 사진에서는 영원할 것처럼."
남자는 이번에 강단 오른편으로 향했다. 이젠 그쪽 청중에게 묻듯이 말한다.
"그러면서 공무원이나 각종 고시들을 준비하는 친구들, 지인들은 무시합니다. 인생 왜 그렇게 사냐고. 해보면 될 것 같냐고 말이죠. 답답한 티를 냅니다. 본인들보다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말이죠. 자기들은 잘난 것 하나 없. 으. 면. 서."
남자는 뒷말에 힘을 주며 말했다. 마치 청중들에게 따지듯.
"그런데 정말 재밌는 사실이 어떤 것인지 아시나요? 저렇게 노력했던 친구들은 20대를 마치고 30대에 들어서면 어느새 하나, 둘 자리를 잡아간다는 사실입니다. 본인들만 빼고요. 그 친구들은 노력해서 그 직업을 얻거나 혹은 그 노력했던 습관을 통해 취업을 합니다. 그리고 그들만의 방식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직급도 올라가고요."
어느새 가운데로 자리를 옮긴 남자는 말을 이어갔다. 거기서 말을 멈출 생각은 없어 보였다. 대신 조소만 가득했다.
"그래서 그들이 선택하는 게 뭔지 압니까? 유튜버나 주식이나 토토나 뭐 그런 것들이에요. 아, 요즘은 글을 쓴다는 사람들도 많더군요. 브런치나 웹소설 뭐 그런 것들로 인터넷에 글도 쓰고 책을 낸다고 하더라고요. 하, 기가 막힙니다. 기가 막혀요. 유튜버는 뭐 아무나 합니까? 누가 개나 소나 작가 시켜줍니까? 그것도 안되니 이제 도박을 하는 거예요. 로또나 사고. 한심하기 그지없죠. 그런 것도 되는 사람이나 되는 건데."
남자는 무엇에 홀린 듯 말을 쏟아냈다. 마치 싸우러 온 사람 같았다. 때때로 토해내는 울분은 진솔함마저 느끼게 했다. 어느새 청중들은 메모도 하지 않은 채 강연에 빨려 들어갔다.
"그들의 인생은 이제 어떻게 될까요? 나이는 먹는데 쌓아놓은 게 없어 우울해하고. 항상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어디로 도피하죠? 어디요? 네, 맞아요. 게임이나 각종 커뮤니티 그런 곳이죠. 뭐 그동안 한 게 뭐 있겠습니까? 게임은 그래도 오래 했으니 남들에게 인정받을 만큼은 할 것이고. 커뮤니티는 가면 쓰기 딱 좋은 곳이죠. 다들 거기로 모입니다."
남자의 PPT는 어느새 막바지로 흘렀다. 남자는 그동안 쏟아낸 말에 목이 막혔는지 바닥에 놓인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켠다.
"자, 그리고 그분들의 특징이 있어요. 바로 이런 강연을 와서 보거나, 온라인 속 명언들을 찾아보고, 동기부여 영상을 보고 감동받는 것이지요. 감동? 받아요. 어쩔 땐 눈물도 흘리더군요. 자신에 대한 위로 또는 부모님이나 가족에 대한 미안함일 수도 있어요. 그런 건 긍정적으로 보입니다만... 문제는 그때뿐이라는 거죠."
남자는 이제 대놓고 조롱하듯 말한다. 냉소적인 어투는 극에 달했지만 청중들 중 누구 하나 대꾸하지 못했다. 그리고 남자는 마지막 PPT라며 포인터를 누른다. 화면에는 단 두 글자만 쓰여있다. '반복'. 남자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내면서 준비한 건 여기까지라고 말한다. 이윽고 주체 측에 시간이 얼마나 남았냐는 신호를 보낸다. 5분 정도가 남았다는 소식에 무슨 이야기를 할까 고민하더니 본인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대부분은 자랑이었다.
남자가 이야기를 마치고 청중에게 양 손을 들어 흔들 때였다. 남자는 등에서 뭔지 모를 강한 충격을 느낀다. 따가우면서도 왠지 모르게 위화감은 없는 고통이었다. 남자는 "아 엄마 왜 때려"라며 투정을 부리면서 VR기계를 내려놓았다. 프로그램 제목엔 '리치의 삶, 강연 모드'라는 글자가 있었고, 왼손엔 VR 동작을 인식하는 기계가 쥐어져 있었다. 남자의 엄마는 "언제 정신 차릴래? 언제? 어이구 나는 하루 종일 일하고 왔구먼..."라고 말하면서 남자의 등짝을 더 때렸다. 남자는 쫓기듯 자신의 방으로 갔고, 당연하다는 듯 침대에 누워 유튜브를 켰다. 유튜브는 동기부여 영상 하나를 추천하고는 그 밑에 각종 게임 공략법, 유명 스트리머의 썰 방송, 먹방 등을 늘어놨다. 어느새 맞은 부위는 차갑게 식어갔다. 마치 뜨거웠던 적이 한 번도 없던 것처럼.
<자화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