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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el Dec 11. 2024

문여사님은 오늘도 안녕하십니다.

고단했던 우리 엄마 문임순 님께 바치는 연서

 “엄마 어디세요?”

 “수곡이다. 콩을 심었더니 비둘기가 와서 다 쪼아 먹어서 그거 지킨다.”

 “비둘기가 먹으면 얼마나 먹는다고 그걸 지키고 계세요? 그냥 집에 오세요.” 

 “아이고, 인자 올해만 하고 진짜 그만둬야 하겠다. 콩도 심지 말라는 건지 다른 집 콩은 잘만 나더니 내 콩은 싹도 안 난다.”      

 우리 문여사님이랑 전화로 주고받은 말들이다.


 우리 엄마는 얼마 전 고향 집 마당을 갈아엎어 텃밭을 만드셨고, 그 밭에 콩을 심으셨다. 그런데 심어둔 콩이 싹을 틔우기도 전에 동네 비둘기가 다 와서는 군데군데 쪼아 먹는 바람에 빈자리가 생겼나 보다. 통화한 그날도 버스를 타고 시골집에 가셔서는 빈자리에 콩을 다시 심으셨고, 다시 심은 놓은 콩을 쪼아 먹으러 오는 비둘기와의 한판을 준비하고 계신중이셨다.  


‘아이고, 얼마나 드실 거라고?’ 여든다섯 노인네가 살림살이도 제대로 갖춰지지도 않는 시골집에 며칠을 머무신다니 속이 상했고, 보태서 새벽같이 일어나 마루에 걸터앉아 새를 보기를 하시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애가 탔다. 


 “엄마 인자 나이 드셔서 비둘기한테 못 이긴다. 내가 해콩 날 때 한 말 사드릴게요. ” 하니, 한 말까지는 필요도 없다시며, 콩도 이젠 올해만 심고 더는 못 심겠다고 하셨다. 대신 올해는 이왕 심어 놨으니 어쩔 수 없다 하셨다.      

 몇 해 전부터 엄마의 작은 농사일은 매년 올해가 마지막이 되고 있다. 그렇지만 다시 새 봄이 오면 다시 ‘그 올해’가 마지막 농사가 되고 있다. 작년 봄 고사리를 채취해 오시면서 ‘이제 이것도 못 하겠다. 올해만 하고 내년에는 치워야 하겠다.’ 하셨지만 여전히 봄에 고사리를 끊으러 버스를 타고 고향 집을 드나드셨다. 죽순을 캐러 가셨다가 대밭에서 넘어지면서 팔이 빠지는 사고가 나면서 ‘아이고 내가 니들을 귀찮게 한다. 인자 죽순이 뭐고, 다 내버려야 되겠다.’ 하셨지만 초여름 비가 내리는 날이면 대밭에 죽순이 올라와 샜을 거라 애를 태우셨다. 그리고 지금은 콩밭 매는 아낙네 코스프레를 하며 비둘기랑 한판을 준비하고 계신다.

아~ 우리 엄마는 콩을 심을 적기를 감나무 잎이 3장이 나오면 콩 심을 때라고 하셨고, 순천의 어느 님은 감나무에 앉은 참새가 보일 똥 말똥할 때가 적기라고 했다. 나도 언젠가는 감나무에 잎이 나면 콩을 심어야 하나 동동거릴지도 모르겠다.      


 우리 엄마 문여사님은 이런 모습으로 여전히 안녕하시다.


 가끔 엄마랑 옛날이야기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당신께서 우리 키울 때는 애 키운 것도 아니라며 귀하게 못 키워줘서 미안하다는 말씀을 자주 하신다.      

 ‘그런데요 문여사님!

 이젠 그런 말씀 안 하셔도 되고 자식들한테 미안한 맘 안 가지셔도 됩니다. 

 제 친구들한테 물어보십시오. 친구들이 기억하는 저는 수곡면 창촌리 조계마을 안에 초특급 금수저였습니다. 저 어릴 때 우리 집에 아재가 두 명이나 있었잖아요. 내가 평상 옮겨달라고 하면 저를 평상에 앉혀놓고 들어 옮겨 주었었고, 아재들이 지게 위에 저를 태워 다녔던 기억도 가지고 자란 저입니다.’


비록 언니랑 작당해 시렁에 있는 유과 바구니를 마당에 패대기치는 수고로움이 따르긴 했지만 그래도 겨울에는 유과도 넉넉했고, 벌레 먹은 것들뿐이지만 가을에는 밤이라면 신물이 나게 먹고 자랐다. 덕분에 우리가 지금 튼튼해도 너무 튼튼해 오히려 뼈 빼고는 다 빼준다는 다이어트 헬스장 앞을 어슬렁거려야 할 만큼 잘살고 있다. 먹는 것뿐 아니라 어린 기억으로 엄마의 손바느질로 만들어진 예쁜 한복도 입고 자랐고, 털 스웨터가 작아지면 이듬해는 다시 그 실을 풀어 좀 더 넉넉하게 털옷을 다시 짜서 입혀주신 것도 기억한다. 내 친구들의 엄마 중에 그런 재주를 가지신 분은 우리 엄마 문여사님이 유일하다.

 또 봄 소풍 가는 날은 맛있고 예쁜 김밥도, 쑥을 넣은 쑥절편도 우리 형제들에게만 허락된 사치였다.   

   


 그렇게 그 시절, 우리 형편에 엄마는 엄마대로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최선을 다해 우리를 키우신 거 잘 알기에 지금의 우리 문사여님께 넘치게 감사하다.      

‘문여사님! 우리 조금만 더 건강하게 같이 살다가 가세요.’         




PS  

짧은 연재를 마치며, 이 글을 쓰는 동안 엄마와 더 가까워지고, 그녀의 삶을 더 깊이 들여다보며 나의 어머니로 그녀에게 감사했고, 같은 여자로 애잔함에 제법 눈물을 흘렸다. 

우리가 함께 할 시간이 얼마나 될지 알 수는  없지만 더 많이 만져보고, 안아보는 시간을 갖고자 노력할 것이다. 

나는 우리 엄마 문여사와 참 많이 닮았다. 그래서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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