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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빛 Oct 29. 2021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재수 기숙학원 시절 회상하기

 생각해보니 국가에서 주관하는 시험에 응시하는 것에는 오래전부터 훈련이 되어 있었다. 수능 성적이 인생의 전부인 줄 알았던 고등학교 3학년 때, 수능을 망치는 비극을 겪었다.




 비극은 수능 시험 당일, 1교시 언어영역  벌어졌다.(당시 '국어' 명칭은 '언어'였다.) 언어 주력 과목이었다. 여기서 표준점수, 백분위를 확보해야 취약 과목이었던 영어에서 실수해도 만회할  있었다. 종료 10 , 언어 듣기 5문제를 포함한 50문제를 모두 풀고 OMR 마킹을 시작했다.

 9시 59분, 종료 1분 전. 마지막 번호의 답을 까맣게 칠하는 순간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분명 마킹을 모두 끝냈는데, 50번이 비어있는 것이다.


 '아뿔싸, 밀려 썼구나.'


 고등학교 3년 간 수많은 모의고사, 내신 시험에 응시하며 인적사항 한번 틀린 적이 없었는데 인생 첫 수능 시험장에서, 그것도 가장 자신 있는 과목인 1교시 언어영역의 답안을 밀려 쓰는 대실수를 범한 것이다. 스톱워치를 보니 30초가 남았다. 어디서부터 밀려 썼는지 찾아야 했다. OMR 카드의 40번 문항에 답을 두 개 마킹하여 10개가 넘는 문항을 밀려 쓴 것을 발견하니, 15초가 남았다. 흘러내리는 땀 때문에 맞게 마킹한 것도 다 번져가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수정테이프를 정신없이 발랐지만 종료령은 10시 정각에 칼같이 울렸다.


 그 뒤의 시험은 기억나지 않는다. 친구들의 증언에 따르면, 1교시가 끝나고 펑펑 울었다고 한다.


 혹시나 싶어 정시 원서를 모두 썼지만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난생처음 받아본 언어 등급이 원인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사회로 나아가는 인생 첫 관문 앞에서 나만 좌절했다는 생각에 두문불출은 물론이고 자기 비하와 자책으로 멍든 겨울을 보냈다. 열등감, 세상에 대한 비관을 온몸에 덕지덕지 붙인 채 살아가는 딸을 더 이상 눈뜨고 볼 수 없었던 탓인지 부모님의 권유로 본가에서 차로 3시간 거리인 재수 기숙학원에 입소했다.


 19년 동안 부모님과 멀리 떨어져 살아본 적은 당연히 없었다. 오직 수능 단 하루를 위해 스무 살의 낭만을 버리고 몇 천만 원이라는 거금을 투자하여 일 년 간 죽어라 공부해야 한다. 여기서 실패하면 우리 가족 모두가 무너져 내릴 거라는 생각에 하루하루 두려움에 떨었다.


 독학 재수였으면 일 년이라는 시간을 비생산적이고 피폐하게만 보냈을 것이다. 다행히 학원에는 같은 처지의 친구들이 많아 아픔을 서로 위로해준 덕에 힘든 재수 생활을 조금은 이겨낼 수 있었다. 마음이 맞는 친구와 이야기하고 서로의 고민이 무엇인지 공유하는 와중에도 불안이 커지는 것을 억누를 수 없었다. 한 학기 대학 등록금에 맞먹는 학원비가 매달 지출되었으니 부모님의 생활고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힘들어하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은 날이면 또다시 끝없는 자책과 비난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댔다. 조용한 자습실에서 행여 친구들에게 방해될까 소리 없이 운 날도 셀 수 없다.(이때부터 숨죽여 우는 방법을 터득한 것 같다.)


 지금은 날씨의 변곡점에서 풍경이 바뀌고 피부에 스미는 공기가 달라지는 것을 느끼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스무 살의 나는 달력이 넘어가고 계절이 지나가는 것이 소름 끼치게 싫었다. 사형 선고를 받고 심판의 날이 무섭게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수능 D-100일이 깨지고 하루 걸러 한 번씩 가위에 눌렸다. 어마어마한 스트레스에 면역력이 감퇴하여 감기를 늘 달고 살았다.


 있는 살림, 없는 살림을 쥐어 짜내어 오롯이 나의 공부에 투자하고 계신 부모님의 고충과 시험에 다시 실패하게 된다면 인생이 끝나버릴 것이라는 중압감에 못 견디게 힘들 때면 마음을 달리 먹어보기도 했다.


 '나중에 엄청나게 좋은 일이 있으려고 이렇게 말도 안 되게 힘든가 보다.

 인생에서 경험하는 고통의 총량은 같다는데 이른 시기에 미리 겪는다고 생각하자.'


 근거 없는 자기 위안이지만 이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수능 공부라는 너무나 혹독한 훈련을 해낼 수 없었다. 수능 특강, 수능 완성 등 수능 문제집을 한 달에 몇 권씩 해치우며 다시는 ebs를 쳐다도 보지 않으리라 이를 갈았다.(10년도 훨씬 더 지난 지금, 매년 평가원 모의고사와 ebs 문제집을 붙잡고 작품과 문제를 분석하느라 머리를 싸매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수능 3일 전, 한 해 동안 동고동락한 친구들과 아쉬운 인사를 하고 귀가했다. 수능 D-100일 이후로 바깥에 한 번도 나오지 않은 탓에 부모님 차에 오르며 느껴지는 차가운 공기에 정신까지 얼어붙어 버렸다. 감기는 수능 당일까지도 낫지 않았다. 새벽 내내 기침이 멎지 않아 거의 못 잔 상태로 수능장에 들어섰다.


 일 년 동안 이 악물며 '무조건 잘 돼야 한다.'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시험장에서는 이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노력한 만큼만이라도 결과로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현역 때 밀려 쓴 수능 성적보다는 훨씬 좋게 나왔다. 하지만 고3 때 밀려 쓰지 않았다고 가정한다면 처음 응시한 수능 성적과 거의 비슷한 결과가 나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학원에서 항상 상위권이었고, 우수한 모의고사 성적으로 장학금도 받았던 것에 비하면 기대에 훨씬 못 미친 성적을 받았다. 아쉬움에 또다시 자책하려는 딸을 애써 위로하시며 부모님께서는 작년보다 안 떨어진 게 어디냐며 안도하셨다.


 2지망이었던 학교가 안정권이라는 모의지원 결과에 따라 가, 나, 다군에 지원할 학교를 모두 결정하였으나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행운이 날아들었다. 아무런 기대 없이 응시한, 정시 성적보다 약간 상향이었던 대학의 논술 전형에서 3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증을 따낸 것이다. 재수 기숙학원에서 일 년 동안 수능 공부에만 매진해 놓고 논술 합격이라니. 듣도 보도 못한 사례였지만 부모님이 기뻐하시니 덩달아 좋았다. 입학 허가를 받은 대학은 현역 때의 정시 성적으로는 지원조차 불가능한 학교였으니 나름 '성공'을 거머쥔 셈이다.



'왜 나한테만 이렇게 힘든 일이 생길까?'라는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생각이 들 때마다 타인에게 기대는 것은 어리석다.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긍정적인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어둠은 언젠가 끝나기 마련이라는 것을 새기며 고통의 순간을 이겨낼 수 있는 마법의 문구를 포스트잇에 눌러 적고 다시 펜을 잡았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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