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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뉴 Jun 18. 2019

마침내 모두가 우산을 접을 때까지

황정은, 『디디의 우산』 (2019)

“모두가 돌아갈 무렵엔 우산이 필요하다.”


작가가 ‘인간애’라고 말했던 우산. 우리에게도 그런 우산이 있을까. 스스로 이렇게 되물었을 때, 몰려오는 우울감과 무력감을 떨칠 수 없었다. 수업에서 중편 「웃는 남자」를 읽고, 도대체 ‘비’가 무엇이기에 d와 dd를 포함한 소설 속 인물들, 그리고 나를 포함한 소설 밖의 많은 사람들을 이토록 무력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또 왜 우리는 돌아갈 무렵에 우산이 필요한지를. 그 해답을 얻고자 했던 소설의 끝에서는 또다시 모호함만이 남았다. d가 마주친 세월호 1주기 추모 집회에서 차벽이 만들어낸 거대한 진공관은 ‘혁명을 거의 가능하지 않도록 하는 혁명’, 즉 절망의 혁명처럼 보인다. 또, d는 dd의 죽음을 통해 충돌 한 번에 내동댕이쳐질 수 있는 인간의 ‘하찮음’을 본다. 그러나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d가 앰프 속의 ‘위태로워 보일 정도로 얇은 유리 껍질’에 불과해 보였던 ‘하찮은’ 진공관이 사실은 섬뜩한 열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다시 혁명의 가능성을 기대하게 되었고, 작가가 말하는 혁명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한 번 더 귀기울여보고 싶었다.


「d」와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는 “모두가 돌아갈 무렵엔 우산이 필요하다.”라는 문장으로 이어지는데, 두 소설은 각각 혁명 직전과 혁명 직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고, 공통적으로 두드러지는 시공간은 혁명의 공간인 ‘광화문 광장’이다. 경찰 차벽으로 겹겹이 가로막힌 세종대로. 그 거대한 ‘진공’의 공간에 ‘d’와 ‘김소영’이 놓여 있다. 「d」에서 d는 사랑하는 이, dd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으로 인해 자신을 가둬두었던 방에서 나와 쇠락한 세운상가에서 택배 상하차 일을 한다. 그곳에서 음향기기 수리공인 여소녀와 ‘dd’에게 ‘REVOLUTION’이라고 적힌 책을 빌려주었던 초등학교 동창 박조배를 비롯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조금씩 삶을 회복해간다. 박조배를 만나 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차벽을 따라 걷던 그는 광화문 광장에서 울려 퍼진 혁명의 함성소리를 마주한다.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에서 화자 ‘김소영’은 구두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미완의 글을 계속 써내는 작가다. 1990년대 운동권 대학생으로 시위에 나섰다가 연세대에서 갇힌 채 모멸과 좌절을 맛보고, 지금은 동성의 연인 ‘서수경’과 무슨 관계인지 정의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가다가,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을 요구하기 위해 광장으로 나선다. 개인적 상실과 사회적 상실, 무력감과 좌절감을 동시에 안겼던 2014~2017년의 날들을 그대로 그려 넣은 소설 속 이들의 이야기는 어쩌면 이 시기를 겪어낸 우리 주변의, 또 우리 모두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그때에 우리는 저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거나 우리는 그들이 아니라거나 하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고. 그 배가 침몰하는 내내 목격자이며 방관자로서 그 배에 들러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어.
─ p.295


촛불로 대통령을 탄핵하기까지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지금, 정말 혁명은 완수된 것일까. ‘김소영’이 쓰고자 했던 ‘완주’, 누구도 죽지 않는 이야기는 쓰일 수 있을까. 작가는 ‘혁명 이후’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며, 우리에게 『디디의 우산』을 건네고 있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의 김소영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언급된 ‘악의 평범성’이 사실 ‘상투성’에 가까운 것이라고 말한다. 상투성이야말로 말하기, 생각하기, 공감하기의 무능을 불러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특히 언론이나 칼럼에서) 너무나도 습관적으로 ‘상식이 통하는 사회’에 대해서 외치곤 한다. 사전에 따르면 상식이란 ‘사람들이 보통 알고 있거나 알아야 하는 지식이며, 일반적 견문과 함께 이해력, 판단력, 사리 분별 따위가 포함된다’고 하는데, 우리가 생각했던 ‘옳은 상식’들이 더 이상 통하지 않을 때에도 그것을 상식이라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상식이 옳은 것이라는 생각 자체가 우리의 환상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상식은 옳은 것이라기보다, 당연한 것으로서 다른 생각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우리가 상식을 말할 때 어떤 생각을 말하는 상태라기보다는 바로 그 생각을 하지 않는 상태에 가깝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것은 역시 생각은 아닌 듯하다…… (중략)
우리가 흔하게 말하는 상식, 그것은 사유라기보다는 굳은 믿음에 가깝고 몸에 밴 습관에 가깝지 않을까.
─ p.265


d는 그저 사랑하는 이, dd와의 행복을 꿈꿨을 뿐인데, 한 순간의 사고로 dd를 잃었다. d는 사고가 난 버스에서 자신의 몸에 밴 습관대로 가방을 잡지 않고, dd를 잡았더라면 d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과 자책감으로 자신을 B02호에 가뒀다. 그랬던 d가 밖으로 나온 후, 버스를 험하게 모는 기사에게 사고의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폭언을 하자 주변 승객들이 오히려 d를 몰상식한 사람으로 쳐다보는 장면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빨리빨리’가 상식이 된 사회에서 버스기사의 행동은 정당화되었으며, 사람들은 ‘죽음’과 ‘사고’를 남의 일처럼 여기고 있다. 또 ‘예의’라는 상식 아래, 트라우마적 반응이기는 했으나, ‘안전하게 버스를 운행하라’는 정당한 요구였던 d의 언어는 배제되었다.


김소영은 이처럼 상식만 통하는 세상의 모습을 ‘묵자의 세계관’이라고 일컫는다. 시각장애인의 글자는 점자이지만, 비장애인의 글자를 표현하는 단어인 묵자에 대해서 우리는 알지 못한다. 비장애인이 다수인 세계에서는 묵자가 디폴트이기 때문에, 너무 당연해서 알 필요도,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지금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라는 안내 방송과 묵자로 된 전광판에서 열차정보를 알고 싶은 시각장애인은 고려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묵자의 세계관에서 시각장애인은 또다시 배제된다. 이처럼 우리는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것들을 가리고, 소외시키고 있는지 모른다.


20년을 함께 살아왔지만, 동성이라는 이유로 국가가 정해 놓은 혼인제도에서 배제되어 서로의 보호자가 되어줄 수 없는 김소영과 서수경. 그들은 서로에게 서로가 매일 세상이라는 위험 속에서 살아 돌아오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김소영의 조카인 정진원이 다니는 어린이집의 P선생이 ‘상식적으로’ 여자아이와 여자아이는 결혼할 수 없다고 가르친 것은 그에게서 이모인 김소영과 서수경의 존재를 지워버림이나 다름없다. “한 번만 더 분홍 양말을 신으면 때려줄 거래.” 어린이집 동급생인 아이 입에서 나온 말 또한 충격적이었다. ‘산다는 것은 우리보다 먼저 존재했던 문장들로부터 삶의 형태들을 받는 것’이라는 롤랑 바르뜨의 말이 실현되어 보이는 순간이다. 아이의 말에서 사회가 배제의 방식으로 약자를 만들어내고, 지워진 존재, 지워야 하는 존재에 대한 혐오가 가능하도록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상식의 언어’가 존재하는 이상, 상식은 웬만해서는 ‘늘 그러하듯’ 상식이 되고, 배제된 것들은 배제된 체 남아있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상식을 경계하고 그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할 이유이며, 계속해서 혁명을 말할 수밖에 없는 현실인 것이다.



산다는 것은 말하는 것입니다. ─ 롤랑 바르뜨, 『마지막 강의』


촛불로 모였던 기억은 너무나 비일상적인 현실이기에, 광장을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되돌아간 일상에서 침잠할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혁명은 광장이 아닌 일상에서 일어나야 하는 것 아닐까. 심지어 혁명을 외치는 광장 그 안에서도 혐오와 배제는 존재했으며, 그걸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여성성에 대한 차별적 문구(惡OUT)가 적힌 플래카드를 보고도 ‘평화적 시위’에 대한 강요와 ‘대통령 탄핵’이라는 모두의 대의명분 아래 그것을 모른 체할 수밖에 없었던 ‘김소영’과 같은 존재들. 혁명이 끝났다고 여겨지는 지금 우리는 그 소외된 존재들을 기억하고 있는지 자문해야 할 때다.


여성, 미취학 아동, 성소수자, 장애인 등
사회적 소수자로 배제되는 이들이
충분히 말할 수 있고, 대답을 들을 수 있고,
일상에서 지금만큼의 부침을 겪지 않는 것.
그게 내가 생각하는 혁명인 것 같습니다.
─ 황정은 작가 인터뷰 中


작가는 말할 수 없던 서발턴들이 말할 수 있게 되는 혁명에 대해서 말한다. 특히, 그런 의미에서 황정은 작가의 『디디의 우산』은 더욱더 의미가 있다. 소설 뒤에 실린 강지희 평론가의 글 중 『디디의 우산』이 최근 한국에서 일어났던 혁명에 대한 기록이라는 말에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것이 ‘아래로부터의’ 기록이라는 점이다. 작가는 그 날, 광장에 있었을 많은 d와 김소영과 서수경과 김소리를 『디디의 우산』에서 호명했다. 이름 없던 그들에게 이름을 붙였고, 그들의 이야기를 문학의 방식으로 기록했다. 또, 그들을 통해 또 다른 혁명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선고가 있던 날,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의 여성, 어린이, 성소수자로 이뤄진 구성원들은 광장에서 환호하는 대신 함께 모여 조용히 식사를 하고 일상을 누린다. ‘촛불 혁명’으로 이들의 삶이 바뀌었다고 할 수 있을까. ‘촛불 혁명’ 이후에 ‘미투 운동’을 비롯해 터져 나오는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들을 때, 분명히 혁명의 자리 안에 있었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온전히 속하기는 어려웠던 그들을 돌아보게 된다. 이 점에서 혁명은 현재진행형이자 아직 완수되지 않은 것(어쩌면 끝내 미완으로 남게 될)이므로, 아직 우리에게 우산은 필요하다.


작가는 dd가 d에게 건넸던 우산은 ‘비가 내릴 때 내 우산만 챙기는 것이 아니고 옆 사람이 우산을 가지고 있는지 살피는 마음’이고 그로부터 혁명은 시작될 것이라고 했다. 일상에서의 혁명을 생각할 때, 옆 사람의 우산을 살피는 마음은 그저 친절한 마음이 아니라 우산에서 소외되고 배제되는 사람은 없는지를 예민하게 살펴야 하는 치열한 자기 성찰에 가까운 것 아닐까. 하나의 혁명이 끝났다고 내 우산을 접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혁명이 필요한 이들에게 우산을 쥐어주는 것. 그것이 가능한 날, d가 박조배에게 말했던 혁명이 도래하고, 김소영의 누구도 죽지 않는 이야기가 쓰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참고문헌

이영경, [책과 삶]“혐오와 낙담이 전부는 아니라는 믿음…혁명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경향신문>, 19.01.25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1252103025&code=96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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