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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마다 소풍 Aug 14. 2021

엄마는 너에게 좋은 것만 주고 싶었어

그런데 그러지 못해서 너무 미안해

자식이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게 해 주지 못했어요. 그렇다고 자식에게 우월한 외모나 뛰어난 두뇌를 물려주지도 못했지요. 그런 부모의 마음에는 늘 자식에 대한 미안함이 머물러요.

금수저나 우월한 외모 또는 뛰어난 두뇌는커녕, 소중한 자식에게 가난이나 장애 또는 병을 대물림하게 된 부모의 마음에는 죄책감이 그늘질 수밖에 없어요.

그저 일상을 열심히 살아가던 미나 씨에게 갑자기 그늘이 찾아왔어요. 가슴 아픈 사실이지만, 자식을 죄인 된 심정으로 바라보며 죄책감의 그늘에 선 미나 씨의 이야기는 언제든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 있어요.  




"갑상선에 종양이 있습니다." 

방학을 맞아 집에 돌아온 딸 은이를 데리고 별다른 생각 없이 매년 하는 건강 검진을 갔던 미나는 의사의 말에 가슴이 철렁했다. 친정 엄마가 갑상선 암으로 수술을 받은 지 몇 년 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받은 건강 검진에서 미나도 갑상선 암 판정을 받았다. 한국인에게 발생하는 암으로 3번째 일만큼 흔한 암이라지만 미나는 정말 무섭고 겁이 났다. 수술 후 약을 복용하고 매년 추적 검사로 관리를 하면서 부디 딸 은이는 이것을 피해 가기를 기도했다. 그런데 미나가 정말 걱정하고 염려하던 일이,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딸에게 벌어진 것이다.

 병원에서 돌아오는 내내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딸 은이가 집에 들어서며 던진 첫마디는 이것이었다.

"나는 왜 엄마를 닮아서 갑상선 암에 걸리는 거야?"

진단 결과에 '내가 딸에게 갑상선 암을 물려주었구나'라는 죄책감으로 끝없이 내려앉는 마음을 억지로 붙들고 있던 끈이 툭 끊어지는 기분이었다. 

  

어릴 적 미나가 툭하면 내뱉던 말이 있었다.

"나는 왜 아빠를 닮아서 까만 거야?"

아버지를 닮아 태어나면서부터 까무잡잡했던 미나는 어머니를 닮아 뽀얀 피부를 가진 여동생이 샘이 날 때면 그렇게 투덜대곤 했다. 토종 한국산 이건만 가끔 인도네시아나 베트남 사람 같다는 이야기를 듣는 날엔 아버지에게 더 심통을 부리곤 했다. 서른 살 때부터 하얗게 머리가 세기 시작했다는 아버지를 닮았는지, 둘째 윤이를 낳은 뒤 머리가 빠진 자리에 하얀 머리카락이 나기 시작한 미나는 남들보다 일찍 흰머리 염색을 시작해야 했다. 쉰이 넘어서야 흰머리 염색을 시작한 어머니를 닮았으면 얼마나 좋았겠냐고 일찌감치 머리가 하얗게 센 아버지 앞에서 미나는 농담처럼 철없는 소리를 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생물 시간에 유전자에 대해 배우면서 미나는 자식들이 부모의 유전자를 반반씩 받게 된다는 이론은 과연 사실일까 의구심을 품었다. 아버지 말에 의하면 애들 키우며 어려운 살림을 하느라 여느 아줌마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되었지만 젊어서는 동네 아가씨들 중에 제일 예뻤다던 어머니의 좋은 유전자가 어쩌면 자신에게는 하나도 안 왔을까 속상해하며 미나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났다. 미나는 자신에게 90% 이상의 유전자를 물려준 것이 확실한 아버지를 두서없이 원망하기도 했다.


과거의 그 시간들이 철없던 시절의 이야기가 될 만큼 미나가 나이를 먹는 사이 딸 은이가 그 시절 미나의 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미나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친구나 아무 노력도 없이 우월한 외모를 갖고 태어났다는 이유로 주목을 받는 친구 또는 그냥 마구 똑똑해 자신보다 쉽게 학교생활을 하는 친구를 부러워하는 은이의 한탄을 들어야 하는 엄마의 신세가 되었다. 하필 아빠와 엄마의 좋은 부분은 피해서 닮았다며 속상해하는 은이의 마음이 너무도 이해가 되어서 안타까웠다. 더불어 오래전 자기 마음의 응어리를 담아 내뱉었던 철없던 말들이 생각나 미나는 아버지에게 너무도 미안했다. 담담하게 미나를 다독여주던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유전자의 마법에 속상해하는 은이를 보면서야 가늠하게 되었다. 좋은 것은 피해서 물려받았다고 투덜대기는 하지만 자신보다 지혜로운 딸 은이가 유전자 마법의 억울함에 얽매이지 않고 밝게 잘 지내주는 것이 미나는 늘 고마웠다.


미나가 얼마나 미안한지 아는 듯이 엄마 탓을 하지 않으려 애를 쓰면서도 이리저리 널뛰는 자신의 마음과 밀려드는 불안감에 은이는 힘겨워했다. 그런 딸의 마음이 너무 잘 보여서 일부러 내색하지 않는 척했지만 미나는 수시로 죄책감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무거운 마음에 휘청댔다.

"엄마는 엄마가 된 뒤에야 발병했는데... 나는 이제 겨우 스무 살인데..."

자기도 모르게 휘몰아치는 생각의 한 자락을 내뱉었던 은의 한숨 가득한 말이 미나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미나가 할 수 있는 것은 일상을 지키려 애쓰며 새 학기 대학생활에 대한 설렘에 가득 차 있던 딸의 마음에 불안과 두려움이 채워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친정어머니와 자신이 걸린 병이 딸에게도 찾아온 것을 알게 된 후로 그것이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그저 그리된 것뿐이라고 남편 민우가 다독여주어도 미나는 자신이 딸에게 병을 물려준 것 같은 죄책감을 떨쳐버리기 어려웠다. 은이에게는 일찍 발견해서 치료받고 관리하면 되니 그나마 다행이고, 더 안 좋은 상황에 처하지 않은 것에 감사하자고 의연한 척 말을 했지만, 정작 미나 자신은 의연할 수가 없었다. 




이십 년 전, 뱃속에 작은 생명이 들어섰다는 것을 알게 된 날부터 미나는 뱃속의 아이에게 좋은 것만 주고 싶어 말도 행동도 음식도 조심했다. 자신이 하는 선택이 뱃속의 아이의 일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생각에 과일 하나 물 한 병을 고르는 데도 신중했다. 하지만 미나의 바람이나 소망과 달리 미나와 남편 민우 씨는 은이가 갖고 싶었던 유전자 대신 받고 싶지 않았던 유전자를 은이에게 물려주었다. 그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닌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섭리겠지만 은이와 같은 생각을 품으며 자랐던 미나는 딸에게 늘 미안했고 그런 은이가 항상 안타까웠다. 


어떤 부모가 자신의 가난을, 장애나 병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을까? 수많은 부모들이 금수저를 물려줄 수는 없어도 안정된 환경을, 대단한 외모는 아니어도 건강한 몸을, 뛰어난 머리는 아니어도 바른 생각을 물려주고 싶어서 최선을 다한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자신과 달리 조금 더 나은 환경에서 살기를, 자신들보다 더 건강하기를, 자신들보다 더 성공하기를 바라고 바란다. 

미나도 다른 부모들과 같은 마음으로 정성과 사랑을 들여 두 아이들을 키웠지만 그런 부모의 바람이나 소망이 늘 현실과 같지 않다는 것을 배워왔고 인생에는 힘과 노력으로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언제든 찾아온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안다. 미나에게는 세상에 나온 지 일 년 밖에 안 된 딸 은이를 수술방에 넣고 눈물을 삼켜야 했던 병원에서의 시간과 그저 은이가 건강하게 자라는 것이 소원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지속적이고 끈질기게 아들 윤이를 괴롭히는 아토피와 밤을 지새우며 싸우던 시간들은 미나에게 자신이 아무렇지 않게 들여 마셨던 공기 속에도 뭔가 잘못된 것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까지도 돌아보게 만들었다. 


모두가 잠든 밤,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며 미나는 무더운 바람과 함께 휘몰아치는 여러 생각들에 잠겨 들었다. 어쩌면 은이가 이 과정을 잘 지나 모든 것을 툭툭 털며 살아가는 동안에도 미나는 은이의 작은 한숨이나 흔들리는 뒷모습에 수시로 죄인의 심정이 될 것이다. 자신에게 있던 잘못된 무엇인가가 은이나 윤이에게 가서 가슴 아픈 흔적이나 남기지 않을까 마음을 졸이게 될지도 모른다. 자신이 마신 물 한잔에 어떤 나쁜 것이 들어있었는지, 자신이 한 어떤 선택으로 인해 잘못된 결과가 두 아이에게 돌아간 것은 아닌지 끝없이 세어보게 될 수도 있다.  

오래전, 지나가던 사람이 베트남에서 왔냐고 했다며 투덜대던 어린 미나와 흰머리 염색을 하면서 속상해하는 미나를 볼 때면 미나의 아버지도 지금 미나와 같은 마음의 무게에 휘청거리셨을 것이다. 그런 마음을 숨기며 '우리 딸이 제일 예쁘다'라고 벙긋이 웃으셨지만 아버지는 몹시 아프셨을 것이다. 소중하게 돌보고 귀하게 키웠건만 여전히 미안하고 죄인이 된 심정으로 그렇게 미나를 바라보셨을 것이다.  

가장 빛나게 피어날 나이에 엄마에게 물려받았을 것 같은 병에 묶인 딸 은이가 엄마를 원망하지 않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지켜보며 미나는 아버지를 미안하게 만들었던 자신의 지난 시절을 돌아본다. 더 좋은 것을, 더 나은 것을 주지 못해 아팠을 아버지를 온 마음으로 느끼며 흔들리는 딸을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되어서야 미나는 죄인 된 부모의 심정을 헤아리고 있다.     




엄마는 너에게 정말 좋은 것만 주고 싶었어.

아빠와 엄마에게 있는 것 중에서 제일 좋은 것들만 너에게 가길 바랬어.


그런데... 그러지 못했어.

엄마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거지만, 그래도 그러지 못해서 미안해.

너무 미안해. 

  



사진 출처 : https://pixabay.com/images/id-103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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