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바다
가끔 누군가의 성공담을 들을 때, "행복하고 든든한 가정환경이 큰 힘이 되었다"는 무해한 문장을 마주할 때가 있다. 그들에게는 감사의 고백일 그 말이, 내게는 무서울 정도의 분노가 되어 치밀어 오른다. 그 평온한 배경음악 같은 말들이 내 귀에는 지독한 폭력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들은 알까. 누군가는 사랑을 지키기 위해 야망을 포기하는 선택지조차 사치였다는 것을. 누군가는 무너진 집안의 기둥을 세우기 위해 자신의 가장 눈부신 계절을 통째로 제물로 바쳐야 했다는 것을. 든든한 울타리 안에서 꿈을 꿨을 그들과 달리, 나는 600평의 거대한 감옥 안에서 매일 밤 무너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홀로 서 있어야 했다.
그들의 '당연한 행복'이 내게는 '평생의 결핍'이었다는 사실을 확인받을 때마다, 내 안의 상처는 다시 붉게 달아오른다. 내가 야망을 선택했던 건 더 많이 가지기 위함이 아니라, 다시는 그런 지독한 고립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한 처절한 발버둥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고통을 건너뛰고 시작점부터 '든든한 환경'을 가졌던 이들의 여유를 볼 때면, 내가 잃어버린 그 푸른 눈동자의 사랑과 아빠에 대한 애증 섞인 세월이 너무나 억울해서 숨이 막힌다. "왜 나는 그런 시작을 할 수 없었나." 이 질문은 나를 다시 저주로 끌어들인다. 성공이라는 성벽을 높이 쌓아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밑바닥에는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무언가에 대한 갈증이 진흙처럼 가라앉아 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졌지만, 결국 가장 기본적이고 소박한 그 '든든함'만은 영원히 내 손에 쥐어지지 않을 것 같아 화가 난다. 성공한 이방인이 되어 화려한 타이틀 뒤에서, 나는 여전히 결핍의 파편을 만지작거린다. 남들의 평온함이 나의 치열함을 비웃는 것 같아 화가 치밀 때마다, 나는 내가 일궈온 이 성벽이 사실은 얼마나 시린 눈물 위에 지어졌는지를 다시금 확인한다. 나의 야망은 유전이었고, 나의 성공은 희생의 대가였으며, 나의 분노는 끝내 갖지 못한 그 '평범한 행복'에 대한 뒤늦은 비명이다.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결국 네가 선택한 길 아니었냐"고. "누굴 원망하느냐"고. 그 서늘한 말들은 비수가 되어 내 가슴에 꽂힌다. 맞는 말이다. 누군가는 똑같은 결핍의 시간을 보내고도 더 현명한 선택을 했을지 모른다. 누군가는 사랑을 지켰을 것이고, 누군가는 야망 대신 사랑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사실이 나를 가장 지독하게 괴롭히는 형벌이 된다. 왜 나는 그들처럼 강하지 못했을까. 왜 나는 내 감정에 솔직할 수 있을 만큼 단단하지 못했을까.
왜 내 곁에는 그때 날 잡아줄 어른 한 명이 없었을까.
18살,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아이가 갑자기 거대한 풍랑 속에 던져졌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앞만 보고 헤엄치는 것뿐이었다. 그 긴박한 생존의 현장에서 '지혜'나 '현명함'을 찾는 것은 사치였다. 그 세월은 나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개조해 놓았다. 맑고 순수했던 열망은 독기 어린 야망으로 변했고, 사랑의 온기보다는 통장의 숫자가 주는 안도감을 믿게 되었다. 가장 취약했던 시기에 겪은 그 지독한 고립은 나를 무장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내 안의 가장 부드러운 부분들을 난도질해 놓았다. 이제 와서 하는 후회와 자기 연민, 그리고 그 끝에 남는 자기 혐오는 나를 가장 힘들게 한다. "그때 누군가 딱 한 명만이라도 내 손을 잡아줬더라면." "그때 내가 조금만 더 나를 사랑했더라면." 혹은 "그때 그에게 솔직하게 말해봤더라면 난 버려질까봐 무섭다고." 이런 부질없는 가정들이 밤마다 나를 찾아와 저주를 퍼붓는다. 성공이라는 화려한 껍데기 안에 갇힌 나는, 여전히 그 비 내리는 바닷가에서 길을 잃고 떨고 있는 아이를 마주한다. 나는 그 아이를 안아주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그 아이의 서툶을 용서하지 못해 미워한다.
나의 20대는 그렇게 야망과 후회, 사랑과 원망이 뒤섞인 채 거꾸로 흘러가 버렸다.
세상 모든 것을 갈 수 있는 힘을 가졌지만, 정작 내 마음속 가장 아픈 그 시절로 돌아가 나를 다독여줄 수 없다는 사실이, 오늘 밤 유독 나를 시리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