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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두선 May 10. 2024

오늘 밤

영화 ‘가나의 혼인잔치: 언약’을 감상하고



기독교와 다른 종교와의 확연한 차이점을 들라고 한다면 무엇보다 메시아인 예수의 ‘재림설’과 ‘휴거’라는 사건이 아닐까? 믿는 이들이나 믿지 않는 이들이나 이 사건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듯이.



예수께서는 왜 세상에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신 것일까?

그 다시 오심과 휴거는 정말 이루어지는 것일까?

그렇다면 휴거는 도대체 언제쯤 일어날까?

이 모든 질문에 대한 궁금함은 우연히 찾아낸 한 편의 영화를 통해 명쾌히 해소되었다.




'가나의 혼인잔치: 언약'


제목에서 ‘가나의 혼인잔치’와 ‘언약’ 사이에 찍힌 콜론을 보며 언뜻 그 상관관계를 이해하지 못한 채 스크린이 열렸다. 궁금함을 해결하기 위해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는 ‘재림과 휴거에 대한 주님의 언약’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이다.

 

가나의 혼인잔치는 예수께서 사역을 시작하고 첫 번째 표적을 행하신 장소이다. 내가 알기로 이 사건의 초점은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는’ 기적에 맞춰져 있었다.


사건의 배경에서 돌 항아리 여섯은 사람이 지어진 여섯째 날을 상징하는 ‘창조된 사람’을 상징한다.

창세기 1장2절에서 보듯 성경에서 물은 대부분 어둠의 세력을 나타내는 것으로, 항아리의 아귀까지 물을 붓는 것은 사람의 상태가 사망으로 가득 을 의미한다. 인생의 누림과 즐거움이 끝난 뒤에 남는 방황과 허무.


그러니까 포도주가 물이 되는 역사는 세상의 즐거움이 완전히 끝날 때, 비로소 포도주이신 주님의 신성한 생명이 역사하게 된다는 예표이다. 마치 밤이 가장 깊을 때 새벽이 찾아오는 것처럼... 그런데  다큐는 성경 연구가들의 오랜 탐사 끝에 가나의 혼인잔치 속에 숨겨진 표징 하나를 더 밝혀냈다. 


대 나라에 속하지만 ‘가나’라는 지역에는 그들만의 특별한 혼인풍습이 있었다. 이는 주님의 재림의 날에 신부인 우리를 데리러 오마고 하신 언약과 ‘소름 끼치도록’ 일치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는 긴 과정이 있다. 먼저는 신랑이 신부에게 청혼을 하는 과정이다. 약혼식이 있다는 소문이 알려지면 온 동네 사람들은 마을 어귀에 모인다. 신랑은 포도주를 직접 잔에 부어 신부에게 권하는데, 이때 신부가 그 잔을 받으면 혼인이 성사되고, 그 잔을 밀어내면 혼인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특이한 점은 혼인에 대한 결정권이 신랑에게 있지 않고 신부에게 있다는 점이다. 마치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주님의 강요에 있지 않고, 우리의 선택에 속한 것처럼.   



혼인이 성사되면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피로연을 위한 준비에 들어간다. 일 년 정도 소요되는 이 기간에 신랑은 신부와 함께 살게 될 아버지의 집에 거처를 준비한다. 직접 방을 증축하고 피로연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일일이 갖추는 것이다.


<요한복음 14:2 나의 아버지의 집에는 거할 곳이 많습니다... 내가 가서 여러분을 위하여 한 곳을 예비하겠습니다.

:3 내가 가서 여러분을 위하여 한 곳을 예비하면, 다시 와서 여러분을 나에게로 영접하여, 내가 있는 곳에 여러분도 있도록 하겠습니다. 아멘.>

 


신부도 혼인 잔치에 필요한 옷감들을 구하여 드레스를 만들고 그 외,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는 긴 기간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잔치 준비가 끝나더라도 그날을 결정하는 권한은 신랑의 아버지에게 있다. 신랑도 신부도 그날을 알지 못하며, 혹여 아들이 독촉한다 하여도 신랑은 기다리라는 아버지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마가복음 13:32 그날이나 그 시각에 관한 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며, 아버지만 아십니다. 아멘.>



그들의 혼인잔치가 한밤중이나 자정에 이루어지는 도 특이하다. 그야말로 한밤중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등불과 기름을 늘 준비해 두어야 한다. 또 언제일지 모르는 이 잔치를 위하여 신부는 준비된 흰 드레스를, 들러리에 참여할 사람들은 흰 옷을 입고 잔다. 그야말로 도둑처럼 임한다는 주님의 말씀에 따른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할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마가복음 13:33 조심하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왜냐하면 그때가 언제인지 여러분이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멘.>



드디어 한밤중에 신랑의 아버지가 아들을 깨우며 말했다.


 “오늘이다. 신부를 데리러 가거라.”


신랑은 그의 친구들과 함께 집을 나서고 동네를 나와, 신부의 집에 도착할 때까지 나팔을 분다. 잠든 신부와, 그녀의 가족과, 참여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기 위함이다. 이때, 오늘을 기다린 사람들은 설핏 든 잠에서 깨어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완벽히 잠들어 세상모르게 자고 있을 게.

날마다의 ‘오늘 밤’을 기다린 신부의 감격이 어땠을까!


 <마태복음 25:5 신랑이 더디 오는 동안, 그들 모두가 졸다가 잠이 들었는데...

:6 한밤중에 ‘보십시오, 신랑입니다! 맞으러 나오십시오!’라고 외치는 소리가 나니, 아멘.>


<계시록 19:7 우리가 기뻐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립시다. 왜냐하면 어린양의 결혼 날이 다가왔고, 그분의 아내도 자신을 준비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멘.>





신부는 신랑 친구들이 땅에 내려놓은 가마를 타고 공중에 들린 상태로 신랑의 아버지 집으로 향하된다. 여기서 ‘들려진’ 상태는 휴거의 의미와 일치한다.



마침내 신부가 신랑의 집에 도착하면 피로연이 시작되는데, 잔치는 칠일 간 속된다고 한다.

참고로 성경에서 의미하는 숫자 7은 삼일하나님을 상징하는 숫자 3과, 모든 피조물상징하는 숫자 4의 연합으로, 완전의 의미를 가진다.


혼인잔치에서 심각문제는 피로연이 시작됨과 동시에 문이 닫힌다는 것이다. 이후에 찾아온 하객들이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문은 절대 열리지 않는다.


<마태복음 25:10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으며, 예비되어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결혼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습니다.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주님, 주님, 열어 주십시오!’라고 하였지만,

:12 신랑이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하는데, 나는 여러분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아멘.>




영화에서 말하듯, 휴거에 대한 관심은 갈수록 옅어지고 있다. 휴거에 대해 이야기할라치면 비상식적인 일로 여겨 조롱당하거나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취급받기도 한다. 더러는 성직자들마저도  사건 다루기를 꺼려한다. 세상의 관점에 맞추고, 입맛에 맞는 말만 하다 보니 복음은 변질되고 왜곡되어 간다는 말에 절대 공감한다.



... 알 수 없는 채로 오늘도 하루는 저물.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어떤 이들은 입을 모은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의 일점일획도 결코 변함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은가.




분명 주님은 첫 번째 표적을 행하시는 이 혼인잔치에서 그분의 재림에 대한 이해를 제자들에게 알리고자 하셨을 터이다. 다른 각도에서 밝혀진 이 사실로 인해 새롭게 매무새를 고친다.


재림과 휴거가 언제인지 그때는 중요하지 않다. 각인해야 할 것은 어떻게 준비하며 사느냐이다, 그분은 눈물도 한숨도 고통도 없는 곳에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 리라는 그 언약을 지키기 위해 신부인 우리를 데리러 오실 것이다.  


<계시록 19:9 ... 어린양의 결혼 잔치에 초대받은 그들이 복이 있습니다... >

<22:20... 아멘. 주 예수님, 오십시오!>



우리는 말씀에 소망을 두고, 준비된 신부로서 믿음으로 오늘을  일이다. 다만 그렇게 예비하면 된다. 

혹여 재림을 보기 전에 우리가 먼저 가서 주님 앞에 서게 되더라도, 예비하고 맞은 죽음으로 인해 기쁘게 떠날 수 있지 않겠는가.


<딤후 4: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웠고, 달려야 할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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