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에도 자신이 없고 막막하기만 했던 어느 날. 가벼운 마음으로 우연히 듣게 된 문학 강좌는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결혼 후 글 쓴다는 것을 사치로 여기며 삶의 울타리를 맴돌고 있던 나는 자아를 발견한 기쁨에 뿌듯했다. 수강 신청을 하고 집으로 오는 길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첫 시간부터 바로 글을 써냈다. 학창 시절 백일장에 나가 매번 상을 탔던 지라 칭찬을 받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n교수의 따끔한 지적을 받았다. 자존심이 상하고 창피했다. 이후로 글을 잘 써보고 싶은 욕망으로 글줄을 붙잡고 늘어졌다. 기성작가들이 쓴 간결한 글을 읽고 나면 감탄을 하면서 동시에 절망했다. 나는 왜 이렇게 안 되는 걸까. 언제쯤이면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해도 내 글은 너무 조잡스럽고 유치했다. 하루 종일 글 쓰는 생각만으로 다른 것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노트북을 펼치고 앉아 모니터를 노려보며 끙끙거리다 닫기를 반복했다. 처음엔 멋모르고 써 내려가던 글들이 점점 알아갈수록 더 어려웠다. 그래도 계속 글을 써냈다. n교수의 지적을 받기도 했지만, 칭찬을 받는 날이 많아지면서 글이 조금씩 나아졌다.
오월의 어느 봄날이었다. n교수가 나를 부르더니 등단을 하라는 것이었다. 수필 공부를 한 지 5개월밖에 되지 않았는데 등단이라니. 그럴 자격이 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나는 얼떨떨했다. 머뭇거리고 있는 나에게 n교수는 말했다.
"그 정도면 충분히 등단할 수 있어. 등단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고 가능성을 보는 거니까. 등단하고 나서 더 치열하게 공부하면 돼."
"교수님. 전 등단하기 위해 글을 배운 건 아니고, 그냥… 글 쓰는 게 좋아서……."
"허허 참. 남들은 등단 못해서 야단들인데, 생각해 봐. c 씨가 아무리 글을 잘 쓴다 해도 그 글을 세상에 보이지 않고 서랍 속에 꼭꼭 숨겨만 두면 누가 c 씨 재능을 알아주겠어? 글은 독자에게 보이기 위해 쓰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등단이라는 제도를 거쳐야 인정받는 거 아니야?"
"그래도 어떻게 저 같은 것이 등단을……."
"아무 말 말고 내가 추천해 줄 때 하도록 해. 한국 문단에서 내 말 한마디면 안 되는 게 없어. 내가 아무나 추천해 주는 줄 알아? 다 할 만하니까 해주는 거고, 그걸 영광으로 알아야지. 이번에 c 씨가 발표한 작품을 추천했고 출판사에 전화해 놨으니까 전화 오면 그렇게 하겠다고 하라고. 알았지?"
"감사합니다. 교수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럼, 가 봐."
뭐가 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얼떨떨하기도 하다가 뿌듯하기도 한 것이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나, 등단했어요!’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휴대폰이 울렸다.
"c 씨죠? 여기 k출판 삽니다. 이번에 c 씨가 낸 글이 우리 잡지 신인상을 타게 됐어요. 축하드립니다. 기쁘시죠?"
"아, 예. 감사합니다."
"작품이 아주 좋던데요. 감동도 있고, 여운도 남고……. 그런데 책은 몇 권 정도 사실 건가요?"
"네? 책을, 사야 하나요?"
"그럼요. 등단하려면 책을 사야 합니다."
갑자기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아직 결정을 못하셨나 보군요? 그럼 생각해 보시고 오늘 오후 3시까지 연락을 주세요."
"책을 사야 한다면 몇 권 정도 사야 하는지요?"
"아, 네. 그거야 본인 마음이지만. 대개 백 권사는 분, 경제력이 허락된다면 이백 권사는 분 다양합니다만 보통 백 권 정도는 사시죠."
"그렇게 많이 사야 하나요?"
"백 권이 뭐가 많습니까? 그거야 기본이죠. 저번 달에 이창식 교수님은 3백 권 사셨는걸요. 그분이야 아는 분도 많으시고 하니 그렇게 사셨겠지만, 여유가 안 되시면 백 권만 사셔도 괜찮습니다."
"글쎄요. 저는 생각 좀 해봐야겠는데요. 책 사서 등단하는 제돈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래요? 그 정도는 아실 줄 알았는데,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르시는군요. 지금은 자기 피알 시대 아닙니까? 자기 글을 알리기 위해 지인들에게 나눠주는 거고, 그러기 위해서 본인들이 자청해서 책을 신청하는 건데 마치 우리가 책 팔아먹기 위해 이러는 걸로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끊겠습니다. 등단을 하든 안 하든 그건 알아서 하시고요."
마음이 복잡해졌다. 이런 식의 등단인 줄 몰랐다 쳐도, 그렇다고 이번 기회를 거절한다면 다시는 이런 기회가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냥 이대로 멈춰버리고 만다면 지금까지의 노력이 허사가 될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가족들 보기에도.우스운 꼴이 되고 말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집안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때였다. 전화벨이 울렸다. n교수였다. 갑자기 경직되어 긴장된 음성으로 전화를 받았다.
"출판사 전화받았어요. c 씨가 열심히 하고 충분히 자격이 되니까 내가 추천 한 건데, 절차상 다들 그렇게 하는 거거든. 정히 내키지 않으면 책은 내가 사줄 테니까. 거기 아니라도 등단할 사람은 많아."
n교수는 차갑고 딱딱한 어조로 말을 했다.
"아닙니다. 교수님. 그런 뜨, 뜻이 아니구요……."
갑자기 나는 말더듬이가 되어 쩔쩔매고 있었다.
"물의를 일으켜서 죄송합니다. 교수님, 제가 그쪽으로 전혀 정보를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그 문제는 교수님 신경 쓰이지 않게 제가 잘 알아서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책을 사서 등단한다는 자체가 내키지 않았고, 내 글에 대한 최소한의 자존심이라도 지키고 싶었던 거였다. 더 실력을 쌓아서 누구나 인정받는 곳에 상금을 받고 글을 내고 싶었다. 그렇다고 이 문제를 누구에게 의논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비록 책을 사서 등단을 한다 해도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해서 더 좋은 글을 쓰면 되는 거 아닌가. 이번에 등단을 발판 삼아 더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책을 사주겠다는 교수 말을 믿고 그렇게 하기에는 두고두고 찜찜하고 부담스러울 것 같았다. 고민 끝에 그냥 50권만 사기로 하고 출판사에 책값을 송금했다.
열흘 후, 책이 도착했다. 월간 수필세계 6월호. 쌓여있는 책 중에서 한 권을 골라 내 글을 찾아냈다. 책 뒷부분에 수상소감이 사진과 함께 실려 있었다.
'차분한 필치가 읽는 이에게 설득력을 주며 꾸밈이나 감정의 과잉표현이 없는 절제된 문장도 합격점이다.'
n교수의 짤막한 심사평이 실린 글을 읽고 또 읽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턱없이 모자라는 재능을 탓하며 밤 새운 적도 많았다. 하지만 이렇게 내 글이 활자화되어 책으로 나오니 또 다른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