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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여행 2

by 정윤

살포시 잠이 든 모양이다. 눈을 뜨니 6시 30분이었다.
큰일 났다 싶어 나는 서둘러 일행들을 깨웠다.

m은 헝클어진 모습으로 냉장고의 물을 마시고 나더니 또다시 잠이 들고, d는 일어나 앉은 채로 잠을 잔다. k와 b도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이 상태에서 잠을 깨운다는 건 역부족이겠다 싶어 난 혼자서 밖으로 나왔다.

급한 마음에 이곳에서라도 해돋이를 볼 양으로 콘도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컴컴했다. 불도 켜지지 않는 계단을 하나씩 밟고 올라갔다. 옥상으로 통하는 문 옆에는 시커먼 문짝들이 우뚝 우뚝 세워져 있었다. 그 모습은 관을 세워둔 것처럼 으스스했다.

옥상 문을 통해 밖으로 나오니 이제 마악 어둠의 베일이 벗겨진 듯 사방은 어슴푸레한 빛에 싸여 있었다. 멀리 보이는 산 위로 수채화처럼 바알간 빛이 서서히 스며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옥상에서는 해돋이를 볼 수가 없었다. 옥상은 해가 솟아오르는 곳 반대방향으로 뒤틀려 있었다. 그나마 해를 보기 위해서는 다른 쪽 통로인 A동으로 가야 했다.

나는 서둘러 옥상을 내려왔다. 어두운 계단을 빨리 내려오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내 다리는 서툴고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뒤에서 뭔가가 잡아당기는 듯했다. 소름이 오싹 끼쳤다. 5층으로 내려오는 마지막 계단이 보이자 나는 층계를 두 개씩 밟으며 뛰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싸한 아침공기가 코로 스며들었다. 바닷가를 향해 걸었다. 바닷가에는 해돋이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많이 나와 있었다. 해가 솟아오르기 직전의 바닷가는 경건해 보였다. 나는 멀리 바라다 보이는 바다 반대쪽 마을은 어떤 곳일까 생각하며 바다 끝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조금 있자 손톱 모양 만한 빨간빛이 바다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 빨간빛은 점점 더 크게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서서히, 서두르는 법 없이, 그러나 강렬하게, 그 빛은 점점 더 넓어지면서 바다 위로 둥실 떠올랐다. 떠오르는 해의 모습은 장엄했다. 순간, 지금 여기에 서 있는 나는 그야말로 극히 미약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넓고 넓은 우주에서 나라는 사람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작은 존재로구나 하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나는 지금 내 인생의 어디쯤에 와 있는 것일까. 내 인생의 종착역은 어디일까. 무엇을 위해 그토록 시간에 쫓기며 살아왔던가. 살아가면서 시도 때도 없이 밀려오는 뜻 모를 그리움과 외로움의 정체는 무엇인가. 울컥 눈물이 솟았다. 붉게 떠오른 덩어리는 검푸른 수면 위로 서서히 온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빛을 받은 바다는 여전히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아침 햇살을 받으며 찰랑이고 있었다.

숙소에 돌아온 나는 일행들을 깨워 라면을 끓여 먹였다.
술 먹고 난 다음 날 아침에 먹는 라면 맛은 일품이다.

라면을 먹고 나자 d가 설거지를 하겠다고 팔을 걷어 부친다. 수세미에 세제를 묻혀 쓱쓱 닦는 모습이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m은 거품이 묻은 그릇들을 수돗물에 헹구어 내고, s는 커피를 탄다. 냄비에 물을 붓고 인스턴트커피를 타는 모습이 웬만한 다방 마담을 능가한다. 커피 맛도 일품이다.

모두들 볼일들을 마치고 난 뒤, 일행들은 하룻밤 묶었던 콘도의 방과 이별을 한다. 정동진행은 무산되고, 우리 일행은 삼척으로 향했다. 삼척을 지나 태백을 거쳐 영월로 가자는 의견이었다. 굽이굽이 단풍이 든 가을 산은 그야말로 나를 흥분의 도가니로 빠져들게 했다. 때론 강렬하게, 때론 은은하게 물이 든 가을 산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언뜻언뜻 상념에 빠져들기도 했다.

m이 운전을 하며 말했다.

"삼척 지나면 태백이 나오거든요. 그곳에 카지노가 있어요. 나도 한 번도 가보지는 않았는데요... 한 번 가보실래요? 어쩌실래요?"

호기심이 동한 나는 그곳에 한 번 가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모두들 가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곳에 한 번 가본 적 있는 j도 그곳을 가보고 싶게 카지노 얘기를 신명 나게 했다.

우리는 말로만 듣던 카지노에 당도했다. 카지노 앞에는 뾰족뾰족한 금속성 탑들과 형광색으로 세워진 건물들이 밤에는 환한 불야성을 이룬다 한다.

우리는 후론트에서 입장료 오천 원씩을 내고 신분증을 제시한 뒤, 입구로 들어갔다. 안내원이 몸 검사와 소지품 검사를 하고 난 후에야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그곳에는 사람들이 벌떼처럼 몰려 있었다.

우리는 먼저 블랙잭으로 갔다. TV에서만 보았던 초록색 원반 주위로 사람들이 빙 둘러앉아 있었고 딜러인 듯한 여자가 서서 카드를 배팅하고 있었다.

자욱하고 매캐한 담배 연기 속에 휩싸인 뿌연 실내를 이곳저곳 두리번거리며 돌아다녔다. 그곳은 그야말로 별천지였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는 분명 다른 세계였다. 환락과, 음모와 번득이는 술수가 집대성해 있는 곳.

그곳에는 이름 모를 게임기들이, 아니 도박판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사람들은 퀭하고 충혈된 눈빛으로 그곳에 빠져 있었다. 그곳의 사람들은 반쯤 넋이 나간, 그야말로 도박에 미쳐있는 모습이었다.

도박에 미친 사람들 틈에 끼여 실내를 두리번거리던 나는 깜짝 놀랐다. 슬롯머신 아래로 동전들이 촤르륵 쏟아지는 것이다.
조금 전까지도 초보인 듯한 남자와 여자가 500원짜리 동전으로 장난스럽게 슬롯머신 앞에 앉아 있었는데, 그들이 장난으로 시작한 지 5분도 안되어 오백 원짜리가 60개나 쏟아져 나오는 것이었다. 그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순간 눈이 뒤집혔다. 블랙잭을 구경하고 있던 m의 손을 끌고 그곳으로 갔다. m도 그 광경을 보자 오천 원을 오백 원짜리로 바꾸더니 게임을, 도박을 시작했다.

동전투입구에 동전을 넣고 작은 창을 보면, 창 속에 7자가 뜨는데 게임기 앞에 있는 단추를 누르다가 이 7자 3개가 나란히 나오면 몇 배의 동전이 나오게 설치되어 있었다.

7자를 나란히 맞기란 아주 어렵다 하더라도 3번 배팅할 수 있는 숫자를 계속하여 한 번씩 스핀을 해도 오백 원짜리 동전이 몇 개씩 자주 나오곤 했다.

조금 지나자 m의 슬롯머신에서 동전 30개가 쏟아졌다. 우리는 환호성을 지르며 그 동전을 가지고 게임을, 도박을 했다.

조금 지나자 내 슬롯머신에서도 동전 30개가 쏟아졌다.
3배로 배팅을 하면 90개가 나오는 건데 소심한 탓으로 한 번씩만 배팅한 탓에 30개밖에 나오지 않았다고 나는 투덜거렸다. 사람 마음이란 이렇게 간사한 것인가.

우리 일행은 촤르륵 쏟아졌던 동전 30개를 서로 나누어 갖고 또다시 배팅을 했다 동전들이 하나, 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동전이 바닥이 나고 말았다. 조금 전의 행운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한 번만 더 할까?라고 m이 제안했지만 우리는 그를 극구 말렸다.
더 이상 미련을 두지 말자. 이쯤에서 우리는 정신을 차려야 했다.
오늘 한 번 도박을 해 본 걸로, 촤르륵 쏟아지던 환희의 순간을 즐긴 그 경험으로 우리는 끝내야 했다.

카지노를 나오며 d가 울분을 토했다. 조금 전 어느 슬롯머신 앞에서 나이 스물이 갓 넘었을까 말까 한 젊은 녀석이 자기 여친에게 이러더라는 것이다.

"자기야, 나 오전에 가뿐하게 300 날렸다."

순간 d는 300? 300이 300원 일리는 없고 그렇다면 3백만 원이라는 거 아냐? 순간 녀석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더니 그 녀석과 그 여친은 희희낙락하며 낄낄거리더라는 것이다.

세상에는 미친넘들이 너무 많다. 저 어린 나이에 저런 정신상태로 뭘 하며 살아갈까. 죽기 살기로 한 달 내내 일해도 월급이 삼백이 못 되는 사람들이 많은데. 가뿐하게 300을 날려버리는 저 대가리에는 뭐가 들어있는 걸까.

우리는 허탈한 심정으로 카지노를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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