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가 가신 길
새벽 알람 소리에 벌떡 일어나 아직도 깜깜한 길을 달려 어둠 속 ’ 제띠안’이란 곳으로 이동했다. 마가다국의 빔비사라 왕이 붓다를 마중 나온 길이고 ‘묘법연화경’의 설법 터인 영축산, 그리고 최초의 사원인 죽림정사, 그리고 마지막으로 열반 후 제1 결집을 한 칠엽굴이 있는 곳이다.
수자타 아카데미를 뒤로하고 짐을 싸서 라즈기르로 이동했다. 부처님께서 하루 평균 15킬로를 걸어서 제띠안에서 빔비사라 왕을 만나게 되었단다. 그 당시 우르벨라 가섭존자를 교화하고 천명의 대중을 이끌고 라즈기르로 가고 있던 중이었다. 빔비사라 왕은 왕국에서도 가까운 대나무숲인 죽림정사를 내어드렸다. 그곳에서 천명의 대중이 함께 수행했다고 한다. 탁발하기도 좋고 조용한 곳이었다. 그 당시 가장 큰 나라의 왕을 교화한 것이었다. 마가다국의 수도인 왕사성은 지금으로 치면 미국 같은 느낌, 나중에 방문할 사위 성은 새롭게 부흥하는 신흥 중국 같은 분위기란다.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대나무를 쭉 줄지어 심지 않고 하나의 방처럼 둥글게 모아 심어서 거기서 잘 수도 있는 작은 아지트가 만들어진 것 같았다. 이곳에서 사리푸트라, 목갈리나, 마하가섭 등 쟁쟁한 분들이 다 붓다에게 귀의 한 곳이다. 그리고 다음에 갈 사위성을 내어준 수자타 장자도 이곳에서 붓다를 친견 후 사위성으로 초청한 곳이고 8대 성지 중 한 곳이다.
인도의 나무들은 넓은 땅에서 안개비를 맞으며 마음껏 위용을 펼친다. 어느 곳이든 너른 초원과 장성한 나무들이 너무 부럽다. 성도하고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름 있는 수행자들이 귀의함으로 붓다가 알려지는 계기가 된 곳이기도 하다.
불자들에겐 익숙한 이름인 영축산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부탄 사람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들은 이 성지에 와보는 것이 꿈같은 일이라 한다. 그래서 법륜스님은 아마도 정상은 그들에게 양보해야 할 것 같다고 하셨다. 역시나 발 디딜 틈도 없다. 약간 아래쪽에 자리를 잡고 명상하고 기도하니 바람 소리만 여 여히 들려온다.
우리가 자주 독송하는 반야심경도 여기서 설법하셨다니 더 감회가 새롭고, 예불 문에 나오는 ‘영산 당시~~’라는 구절이 있는데 그 영산이 여기 영축산이다. 여기는 또한 데바닷타라는 수행자가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붓다를 해하려고 했던 곳이기도 하다. 언제든 이런 사람은 있었구나! 욕심을 버리는 것이 제일 큰 수행이다. 독수리 봉에서 설법하시는 붓다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서 산에서 내려왔다.
다음은 칠엽굴에 올랐다. 법륜스님은 지팡이를 짚으시면서도 잘 걸었다. 함께 줄 서서 올라가니 뒤 쳐질 수도 없다. 쉬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고 올라가니 라즈기르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렇게 이동하면서도 순서대로 봉사를 한다. 자리 깔기 봉사라든지 차량에 짐 싣기라든지 배식이 있을 땐 당번을 한다든지 길 안내라든지 누구에게나 소임이 있고 모두 소임이 ‘복’이라 하고 기꺼이 그 일들을 즐겁게 한다. 그 덕분에 행사는 항상 지체됨이 없이 순조롭게 돌아간다. 33년을 매년 다녀오시면서 계속 업그레이드시키는 매뉴얼이 큰 일을 한다.
일곱 개의 가지란 뜻의 칠엽굴 안은 7개의 방으로 나뉘어있고 붓다 열반 후 500명의 비구가 모여 부처님의 말씀인 ‘경’, 부처님이 행동하신 계율의 ‘율’을 만들었단다. ‘여시아문’이란 말이 있다. 나는 이렇게 들었다는 뜻인데 부처님이 말씀하셨다가 아니고 ‘아난다’가 이렇게 들었다고 표현했다. 이미 돌아가신 뒤라 100%는 아니기 때문이다. 문자도 없던 시절이라 그렇게 구전되어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가섭존자가 이렇게라도 결집을 해놓아야 붓다의 말씀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겠냐고 의견을 제시하고 아라한과를 증득한 5백 명이 결집해서 모두의 의견이 일치하면 다음을 진행하는 순으로 해서 석 달이나 걸렸다고 한다. 그렇게 암송해서 전해진 경전을 우리가 볼 수 있으니 감사한 일이다.
바쁜 일정을 마무리하고 뉴타이 절에서 밥솥에 양배추를 넣은 밥을 해서 쌈도 싸 먹고, 또 새 밥을 해서 내일 도시락을 싸두고 잠자리에 들었다. 긴 하루의 끝은 꿀잠이었다. 핫팩을 넣은 침낭 속이 이렇게 따뜻하고 편할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