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코칭과 망치, 그리고 천둥
Odin: Even when you had two eyes, you'd see only half of the picture.
Thor: She's too strong. Without my hammer, I can't
Odin: Are you Thor, the god of hammars?
- Thor: Ragnarok
영화 '토르3: 라그나로크'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입니다. 스스로 전지전능하다고 말할 만큼 강한 토르이지만, 죽음의 여신 헬라의 힘은 압도적입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망치는 영화의 초반부에서 이미 헬라의 손아귀 힘만으로 박살나버렸죠. 헬라에게 처참하게 얻어터지는 와중에 토르는 아버지 오딘의 환영을 봅니다. 헬라가 너무 강해 망치 없이는 이기지 못한다는 토르의 말에 오딘이 대답합니다. 네가 망치의 신이더냐?
맨 처음 학습코칭을 시작했을 때 마치 전지전능한 힘을 가진 듯했습니다. 학생의 다음 시험 성적에 명운이 달려 수업하기 급급했던 제가 게임을 판도를 바꿀 궁극의 아이템을 손에 쥔 듯했죠. 하지만 망치를 쥐면 모든 게 다 못으로 보인다던가요. 신나서 휘두르는데 어쩐지 내가 엉뚱한 곳에 이 망치를 휘두르고 있는 건 아닌가, 내가 정말 전지전능하긴 한 건가 의심이 들기 시작했죠. (망치 들고 신나게 깨지는 이야기는 여기에서 https://brunch.co.kr/@neria4u2g/1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앞서 학습코칭이 자기주도 학습역량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설명을 드렸습니다. 덜 고통스럽게 살 빼는 방법에 대한 갖가지 연구가 존재하듯, 어떻게 하면 인간이 자발적으로 노력하고 공부하게 될지 알아내기 위해 수많은 학자들이 자기주도 학습의 구성 요인들을 밝혀왔습니다. 학자들마다 설명하는 방법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자기주도 학습에는 크게 동기, 인지, 행동 세 가지 요인이 있고, 이 중 어떤 핵심 요인이 자기주도 학습역량을 키우는데 결정적인 도움이 되는지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 중입니다. (동기, 인지, 행동이 무엇인지 헷갈리신다면 https://brunch.co.kr/@neria4u2g/2 으로 복습해 보세요!)
제가 오딘의 대사가 인상 깊게 다가온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아직 라포(코치와 코치이 사이의 상호신뢰관계)를 형성하기 전인 코치이에게 제 모든 힘을 다 쏟아 넣을 수 없으니 제대로 집중해서 쓰려고 동기, 인지, 행동의 망치를 손에 쥐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망치가 힘 그 자체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망치에 집착하고, 어느 것이 가장 강력한 망치인지 따지기 시작했죠. 시야가 좁아져 버린 것입니다.
한 때는 동기부여가 학습 코칭의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매일 꼬박꼬박 그릿이나 몰입, 리더십, 진로진학 코칭 특강을 하는데 온 힘을 다했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릿과 몰입이 무엇인지 알고 내 진로 로드맵도 그려본 아이들이 정작 공부는 하지 않았습니다. 역시 행동만이 답이다, 플래너 쓰기에 집착해 시간관리와 목표관리, 행동 통제에 열중하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공부시간은 2시간도 안 되는 알차고 아름다운 플래너들이 속속 만들어졌습니다. 과연, 사람은 어떻게 하는지 알아야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법이 아니겠는가. 영어 수학 국어 등 각 과목을 공부하는 방법과 노트 필기 등에 꽂혀 한동안은 또 그것만 줄곧 가르쳤죠. 결과는 짐작하시리라 믿습니다.
자기주도 학습역량을 키우기 위해서는 어느 망치부터 휘둘러야 할까? 제겐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 질문입니다만, 요즘 자주 오딘의 말을 떠올리며 망치를 휘두르려는 저를 달래곤 합니다. 토르는 망치의 신이 아니죠. 자기주도 학습도 동기와 인지, 행동의 하부 요인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자체가 아닙니다. 또한 모든 학생들에게 그 셋을 다 때려 넣으려고 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요즘 새삼스레 깨닫습니다.
예를 들어 초등학생에게 공부에 대한 동기가 있다고 한들 그것을 위해 하루에 서너 시간씩 몰입하여 공부할 수 있을까요? 성공 = 재능 * 노력의 제곱이라는 공식을 만들어낸 <그릿>의 창시자 앤절라 덕크워스 박사는 무언가에 열정을 갖고 끈덕지게 해나가는 '그릿'을 갖기 위해서는 우선 흥미를 탐색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생각해보면 간단한 이치입니다. 내가 좋아하고 관심을 가지는 것에서 그릿이 싹트는 법이니까요.
초등학교 시절은 이 흥미를 탐색하는 시기입니다. 터무니없어 보일 정도로 이것저것 해보고, 실패하고, 돌아서게 해줘야 하는 시기이죠. 우리 아이는 끈기가 없어요 라고 걱정하시는 소리가 벌써부터 들리는 듯합니다만 아이들은 타고나길 배움의 대가이고 열정의 화신들입니다. 공룡 이름을 줄줄 읊고 좋아하는 만화 캐릭터들의 이름과 역사를 죄다 아는 아이들 많이 보셨죠? 부모님들께서는 간절히 공부에 그 열정이 쏟아지길 바라시겠지만 공부 자체에 흥미를 갖는 것은 훨씬 더 어렵고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니 아직은 너무 조바심 내지 마세요. 게다가 하나에서 넘치는 물은 다른 분야도 적시기 마련입니다. (아직 미취학 아동이긴 하지만) TV 애니메이션을 너무 보는 게 아닌가 걱정하게 만들던 저희 첫째는 요새 자기가 본 만화 내용으로 인형극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숫자를 세고, 세상 만물에서 포니들을 발견하며 배워나가고 있답니다.
그러니 초등학교 시절의 학습 코칭은 아이의 흥미를 열정으로 옮길 수 있는 분야를 찾아 그것이 넘치고 흐르도록 도와주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아이는 '나는 이것만큼은 잘 해!'라는 자아효능감을 차곡차곡 적립해나갑니다. 그래서 훗날 내가 잘 못하는, 하기 싫고 힘든 공부와의 싸움에서도 그 자아효능감을 알음알음 까먹으며 버틸 수 있죠.
이 흥미 탐색은 반드시 직접 체험만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책을 통한 간접 체험의 힘도 매우 큽니다. 특히 요즘처럼 읽기 부진의 아이들이 쏟아지고 있는 시기에는 독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수학 문제를 못 푸는 이유가 수학 때문이 아니라 국어 때문이고, 영어 지문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가 국어로 해석해놓은 것을 보아도 무슨 소린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초등 6년, 아니, 중등 3년까지도 모조리 독서에 투자해도 아깝지 않을 정도입니다. 왜냐하면 깊이 있는 독서 능력은 결국 지식의 이해 및 체득 능력이고 자기주도 학습역량과 매우 많은 부분 맞닿아 있을 뿐만 아니라 방대한 배경지식까지 갖출 수 있으므로 언제든지 공부 실력으로 폭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흥미를 탐색하고 책을 읽으며 성장한 초등 고학년은 슬슬 진로 탐색이나 공부법 코칭, 플래너 작성 등을 해보며 본격적인 학습코칭의 세계에 발을 들일 적기입니다. 하지만 말씀드렸다시피 아직 그릿을 요구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니기 때문에, 과도한 선행이나 몰입을 기대하기보다는 스스로 분량을 정하고 그것을 해내며 성취감을 맛보는 공부 효능감 축적이 최대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내 흥미 분야에서의 자아효능감을 바탕으로 공부에서의 자아효능감까지 쌓을 수 있다면 초등학생 시절의 학습 코칭은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반면 중학생들은 조금 사정이 다릅니다. 일단 초등 고학년만 돼도 아이들이 슬슬 부모님의 통제에서 벗어납니다. 몸은 커졌고 학교급도 변화했고 그만큼 어른 취급을 받고 싶어 하지만 속은 초등학교 때 그대로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중학교 올라오니 공부할 것도 많고 어려워졌어요, 하면서 노는 건 초등학교 때 못지않게 팡팡 놀아 부모님과 선생님의 속을 썩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2차 성징의 여파로 하루가 멀다 하고 감정이 죽 끓듯 변합니다. 이성에 관심을 쏟느라 공부를 멀리하기도 합니다. 이 시기를 현명하게 보내는 것이 중학생 학습코칭의 핵심입니다. 중학생이 된 만큼 내 행동과 감정을 조절하여 어렵고 하기 싫어도 공부를 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주지 시키되, 너무 믿지 말고 행동을 통제할 수 있도록 개입을 해줘야 합니다. 마치 다이어트 초기 집에서 간식이란 간식은 싹 치우고, 운동 가기 싫다고 울어도 단호히 체육관 앞까지 데려다주는 개입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죠. 그렇게 식단을 조절하고 운동을 하는 고통에서 즐거움이 온다는 것을 느끼게 해줘야 스스로도 그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일 테니까요.
혹시나 하여 첨언하자면 이 개입이 반드시 강제적인 형태여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이어트 도시락이 그래도 썩 맛있다면, 체육관 트레이너가 박보검을 닮았다면 저절로 가고 싶어 지지 않겠어요? 사실 이렇게 당근을 가장한 채찍인 편이 훨씬 현명한 학습코칭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부러 고행을 강요하는 것이 누군가에겐 통할지 몰라도 모두에게 통하진 않습니다.
참고로 제가 가장 애용하는 당근처럼 생긴 채찍은 '조기퇴근권'입니다. 얼만큼만 하면 집에 일찍 보내주마. 또는 이번 주 학습량을 다 마치면 그 후론 학원에 오지 않아도 좋다. 수요일까지 미리 다 할 수만 있다면 목요일 금요일 안 나와도 좋다! 그러면서 월요일 주간 학습 계획을 짜며 학습량을 정할 때 아이가 보기에 과하지 않은, 그러나 사실 꽤 적지는 않은 분량으로 딜(?)을 합니다. 저의 개입이 상당히 많이 들어갔고 아이들도 어쩐지 속았다는 표정이긴 하지만 아이들의 뇌는 이것을 '내가 스스로 정하여 실천에 옮긴 것'이라고 받아들일 것이고, 이게 자기주도 학습역량의 씨앗이자 그릿의 두 번째 주춧돌인 '의식적인 연습'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고등학생의 학습코칭은 사뭇 성격이 달라집니다. 이 시기의 학습이라고 원칙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고등학생에게는 압도적인 학습량, 내신 성적, 그리고 대입이 걸려있습니다. 하나하나의 시험에서 결과를 내지 않으면 제아무리 강심장 이어도 좌절하기 마련입니다. 이미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굳어진 학습 습관도 관건입니다. 좋든 나쁘든 습관은 고치기 어렵습니다. 이 시기의 학습코칭은 환골탈태, 뼈를 깎는 노력을 요구하는 때가 많습니다.
따라서 고등학생의 학습코칭은 반드시 강도 높은 진로진학 코칭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아이들에게 하기엔 슬픈 이야기입니다만, 어떻게든 탈탈 털어 나의 흥미와 적성을 찾아내 진로와 진학을 확정 지어야 선택과 집중을 할 수 있습니다. 이때 홀랜드 진로 흥미검사나 프레디저 진단 등의 도구를 활용하면 도움이 되는데,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관련 학과와 대학, 입시 전형까지 깊이 있게 살펴보아야 의미가 있습니다. 교육부와 한국대학교육협회에서 만든 진로정보망 커리어넷 www.career.go.kr 과 대입정보포털 어디가 http://www.adiga.kr/ 를 활용하면 가능합니다. 학교마다 계시는 진로선생님께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내가 가려는 대학의 입시전형까지 파악하고 나면 그때부터는 거기에 해당하는 과목에 필요한 공부법과 학습 전략을 중심으로 학습 코칭에 들어갑니다. 요즘의 대입은 학생부가 매우 중요하므로 독서와 학교 행사 참여에도 힘써야 하니 플래너와 체크리스트로 시간 및 목표관리에도 힘써야 합니다. 종종 '한시가 급한데 느긋하게 플래너 쓸 시간이 어디 있느냐'라고 반문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시기의 플래너는 혼자 하는 공부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자기주도 학습 = 혼자 하는 공부는 아닙니다만, 적어도 고등학생이 되었는데 학교 수업 외의 공부 시간이 강의식 수업으로만 채워졌다면 절대로 투자 시간 및 에너지 대비 학습 효율을 챙길 수 없습니다.
고등학생의 학습코칭이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미 꽤나 수준 높은 자기주도 학습역량을 보여줘야 하는 시기에 누군가가 통제해줘야만, 시키고 강요하고 제시해줘야만 공부를 하고 있다면 철저한 환골탈태가 필요한데, 마음도 급할 뿐만 아니라 그런 고통을 감내할 자신도 없는 겁니다. 마치 딱 1년 만에 지금 몸무게에서 20kg을 빼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해야 한다는 건 압니다만, 그 고통을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요?
그러니 반드시 내 수준에 맞춘, 그러면서 흥미와 적성까지 고려한 진로진학 코칭을 먼저 하여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여 할 수 있는 선에서 목표를 설정한 후 그것이 흐트러지거나 흔들리지 않는 꾸준한 관리로서의 학습 코칭이 필요합니다. 간혹 고등학생의 학습코칭을 대입 전형 파악, 학생부 관리, 자기소개서 첨삭 같은 것으로 오해하는 분들이 계시는데 반의 반 정도만 맞습니다. 예체능 계열을 제외한 대부분의 대입 전형은 일단 성적이 우선이고, 학생부와 자기소개서는 그것을 보완하고 성실히 학교 공부와 활동에 참여했는가를 파악하는 보조적인 수단 정도입니다. 이것은 대입 제도가 아무리 바뀌어도 변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종종 대치동 학원가에서 엄청나게 고액으로 대입 관련 코칭을 해준다는 기사들이 눈에 보이는데, 대학이 바보가 아닌 이상 다른 사람이 만들어낸 학생부와 자기소개서를 못 알아볼 리 없습니다. 고1 때 내가 써서 낸 독후감의 내용도 가물가물해서 자기소개서 쓰려면 가물가물한 판국에 남이 써준 것이 먹혀들어 갈 리 없습니다.
토르는 망치의 신이 아닙니다. 천둥의 신이죠. 제가 이 글의 서두에서 소개한 장면을 좋아하는 이유는 사실 오딘의 말 때문도 있지만 그 이후의 장면 때문입니다. 자신이 천둥의 신임을, 자신의 전능함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깨달은 토르의 번쩍번쩍한 액션은 볼 때마다 전율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리고 늘 스스로에게 한 번 더 이야기합니다. 내 망치가 내 힘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학습코칭은 학습자의 자기주도 학습역량을 키우기 위한 것이며, 어디를 어떻게 때려야 하는 질 알아야 비로소 제대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이 깨달음들을 앞으로 조금씩 브런치를 통해 풀어나가려 합니다. 지켜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