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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조 Nov 03. 2022

비로소 '탈 캥거루족'을 선언합니다

독립한 탈캥거루 이야기

나는 꽤 오랜 기간 캥거루족으로 살았다. 취업 준비가 길어진 탓이었다. '고시'라 불리는 시험에 오래 집착했다. 9부 능선에서 미끄러지니 포기가 안됐다. 그것이 나를 가두는 족쇄였다는 것은 사회에 나오고 나서 깨달았다.


마음의 여유도 주머니 여유도 없었다. 3년 전 어버이날이었다. 가난한 나는 작은 카네이션 꽃바구니를 샀다. 그리고는 노란 포스트잇에 '캥거루 은혜'라 써 붙여서 드렸다. '캥거루 은혜'라는 표현에 엄마는 빵 터졌지만 내 가슴은 '팡' 터지는 심정이었다. 이 나이 먹도록 부모님에게 제대로 된 선물 하나 못드린 다는게 그저 속상했다.


취업을 한 뒤에는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월급의 80%를 저축하곤 했다. 부모님이랑 같이 살기 때문에 대학생 때의 소비 수준으로도 생활이 가능했다. 애인도 없었고 취준이 길어지면서 친구들과의 왕래도 끊었다. 그래서 돈 쓸일이 없었고 돈이 조금씩 모이기 시작했다.


사회생활 1년 정도가 지나고 나서 애인이 생겼다. 돈 쓸일이 조금 더 생겼다. 사고 싶은 옷들이 늘었고 머리 스타일도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침 코로나로 풀린 유동성으로 투자 열풍이 불 때였다. 소액 투자를 하면서 돈을 더 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업을 하기 시작했다. 월급에 대한 불만을 조금 해소시켜줬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그때만해도 독립의 '독'자는 생각지도 못했다. 돈을 더 악착같이 모으려면 내가 이 집에 붙어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혼자 살면 높은 저축률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돈모으기 쉬운 환경'은 공짜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365일 붙어 있으면 부딪치는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부모님도 나이가 지긋해지시고 나 역시도 'MZ세대'의 방패 뒤에서 서서히 꼰대의 길(?) 걷고 있었다. 이따금씩 갈등 상황이 벌어지면 '혼자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회사 출장으로 호텔에서 혼숙을 하게 됐다. 운이 좋았다. 고급 호텔들에서 2박, 3박씩 혼자 재워줬다.  좋은 원룸에 혼자 사는 기분이었다. 좋은 것만 경험하게 해주는 호텔의 특수성을 제외하더라도 '혼자만의 고요한 시간'을 경험하는 건 큰 행복이었다. 문득문득 혼자 사는 삶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현실로 돌아와서 반복된 일상을 살았다. 돈을 모으고 부모님이랑 껄껄거리다가도 이따금씩 부딪혔다. 여전히 출퇴근길은 아득했고, 부모님의 각종 부탁들은 나의 고요한 밤을 깨웠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계산기를 두드려보기 시작했다. 독립으로 인해 내가 얻는 것과 잃는 것. 돈이 더 나가는 건 분명했다. 하지만 그만큼 더 많은 경험을 얻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돈이 갑자기 몇백씩 깨지는 것도 아니다. 몇 십이 더 나가는 만큼 새로운 경험으로 그 이상의 돈을 채울 수도 있는 거 아닐까?


여기에 결정타를 찍은 건 '인생'이었다. 인생은 길지만 '혼자사는 인생'은 짧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부모님과 함께 생을 보내다가 결혼을하게 된다면? 만약 아이라도 낳게 된다면?


아찔했다. 이제 내 인생에서 온전히 나와 내 영혼이 동거할 기회는 영영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결과가 늘 좋을 수는 없지만, 실행력 하나만큼은 누구보다 빨랐다.


운 좋게 마음에 드는 집을 빨리 발견했다. 여기에 청년을 위한 아주 매력적인 저리 주택담보대출이 있었다. 계산기를 두드려보니 집을 나온다고 해서 생각보다 큰 돈이 들어가지 않았다. 진작에 왜 나올 생각을 못했을까? 우물안 개구리었다.


일사천리로 대출과 부동산계약, 이사까지 완료했다. 모든 것이 처음이라 쉽지 않았지만 동시에 설레기도 했다. 천천히 씨드를 모아가면서 부동산 공부를 해야겠단 생각도 들었다.


어느덧 혼자 산 지 한 달이 다 되어가고 있다. 만족도는 최상이다. 매일 밤, 나의 고요의 시간을 온전히 누릴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다. 지금 이 글도 그 고요 속에서 써내려가고 있다.  


더불어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니 외려 더 돈독해진 것 같다. (정확히는 내가 철이 들어가는 중이다) 독립 2주만에 본가에 방문했었는데 엄마는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고 부산스러웠다.


바리바리 싼 반찬 가방. 내가 지하철을 타고 간다고하니 엄마는 개찰구 앞까지 따라왔다. 무거운 짐들을 굳이굳이 본인이 메고서. 이게 모든 어머니들의 마음인 걸까? 나는 엄마와 손인사를 하고 지하철에 올랐고 금새 눈시울이 붉어졌다.


유난스러울 수도 있겠다. 뭐 부산에서 서울 올라가는 것도 아니다. 본가에서 이사집은 겨우 지하철로 30분 정도도다. 하지만 중요한 건 거리가 아니다. 10분이건 20분이건 '떨어져 산다는 것'의 의미다.  


부모님은 꽤 애틋한 마음이신 것 같았다. 어리게만 보였던 자식이었는데 '(무사히) 다 컸구나' 라고 생각하시는 듯 싶었다. 잘 자라줘서 기쁜 마음, 동시에 부모라는 역할의 부담을 조금은 내려놓을 수 있는 안도감, 더불어 이제 남은 본인들의 생을 어떻게 마무리 지을까에 대한 고민 등이 복합적으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너무 진지한 의미부여는 나만의 착각일 수도 있겠다. (맞다, 나는 ENFJ다) 모쪼록 내가 독립함으로써 우리집의 관리비와 빨랫거리는 현저히 줄었으니 어쩌면 진작에 나가는 게 효도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캥거루 배 밖으로 튀어나온 지 약 한 달이 지났다.

성장을 갈망하는 탈캥거루족은 이제 새로움을 향해 힘껏, 점프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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